만약 그 때 다른 길을 갔었더라면, 만약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만약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이제 더 이상은 뒤돌아보지 말아야할 지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 우리가 흔히 던지게 되는 가정들이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상상처럼 매혹적인 위로도 없지만 그러나 사실 그것만큼 부질없는 질문도 없다. 이번주에 살펴볼 내용 중, 『누가 알겠소?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해 그대가 왕비자리에 이르렀는지』라는 표현은 난관에 봉착한 이스라엘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할 에스델에게 모르드개가 해준 말이었다. 모든 역사는, 아주 사소하고 평범한 개인의 삶까지, 그리고 때로는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하는 고통의 순간까지도, 더 깊은 성숙을 위해 하느님께서 계획하고 주관하심을 고백하는 일종의 신앙고백인 셈이다.
1~3장의 내용을 토대로 본다면, 아직까지 주변의 난관을 굳은 신념과 지혜로 극복해 가는 인물은 모르드개이다. 에스델이 점차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4장부터인데, 단지 착하고 예쁜 규수일 뿐이었던 그녀가, 어떻게 해서 목숨을 걸고 자기 민족을 구해낼 만큼 강하고 지혜로운 여인으로 거듭나게 되는지 그 구체적인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4장, 난관에의 봉착
유다인들에 대한 하만의 음모를 전해들은 모르드개와 전국의 유다인들은 탄식과 통곡을 쏟아낸다(1~3절). 모르드개는 자루옷을 입고 궁궐대문에서 시위를 하고, 그 때까지 영문을 몰랐던 에스델은 이러한 모르드개의 행동에 당황해하며 시급히 옷을 보낸다. 에스델이 시종을 보내 그 연유를 묻자, 모르드개는 하만의 음모와 유다인 절멸의 대가로 왕에게 내놓겠다고 한 은전의 액수를 알려준다. 이어 반포된 칙령의 사본까지 보내면서 무엇인가 조처를 취할 것을 요청한다(7~8절). 특별히 8절의, 모르드개가 에스델에게 전하라고 한 말 중에는 『그녀의 민족을 위해』(8절)라는 히브리어 표현이 눈에 띄는데, 이는 그녀가 난관 앞에서 짊어져야할 「거국적」이고 「민족적인」 책임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킨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시종으로부터 모르드개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에스델은 왕이 부르기 전에는 왕을 만날 수 없고 이를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해지게 되는 법규를 설명한다(11절). 이러한 비인격적인 법규가 정말 존재했었는지 현재 우리로서는 확인할 수 없는데, 그 어떤 고대 법령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 혹은 역사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자가 이러한 내용을 통해 에스델이 이제 「목숨을 내놓는 용기와 모험」을 단행하게 될 것임을 의도적으로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스델의 곤란한 사정을 듣게 된 모르드개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유다인들이 멸절당할 상황에 혼자 살아남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일침를 가한다(14절). 이러한 모르드개의 반응도 좀 의아하게 느껴지는 부분인데, 에스델의 곤란한 처지가 뭔가 왜곡되어 이해된 듯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13~14절에 제시된 모르드개의 날카로운 반응은 에스델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는,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들을 겨냥한 저자의 직접적인 경고로 이해할 할 수 있겠다. 즉, 저자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에스델서가 최종적으로 제작될 당시의 유다인 고관들에게, 민족 전체가 말살될 수도 있는 지경 중에, 자신의 이익만을 찾으려는 이기적 계산으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4절의 『누가 알겠소?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하여 그대가 왕비 자리에까지 이르렀는지』라는 표현은 저자의 신학적 관점을 결정적으로 드러내 주는데, 하느님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모든 역사와 인간사를 전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심을 잘 규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얘기를 다시 전해들은 에스델은 모든 유다인들이 함께 삼일간 단식하고 기도할 것을 제안한다. 하느님 안에서의 진정한 연대는 「공동기도」를 통해 심화될 수 있음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민족과 타인을 위해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비장한 다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법을 거스르는 것이기는 하지만, 임금님께 나아가렵니다. 그러다 죽게 되면 기꺼이 죽으렵니다』(16절).
사는데 필요한 믿음
쉽게 동의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각자의 인생이고 역사일 수 있지만,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사실은 가장 충실하고 진정한 하느님의 사랑과 이끄심의 발로였음을 인식하게 될 때, 아직 다 못푼 과제, 즉 이 세상에 왜 태어났으며 죽는 순간까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라는 질문은 더 이상의 조급한 화두로 남아있지 않을 수 있다. 초연한 평화,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과 의탁을 통해서만 도래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런 평화가 내 마음에 없다면 세상은 언제 어디에서고 그저 감옥으로 느껴질 뿐임을 또한 아는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 대한 보다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믿음만이 내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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