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교후 박해자로 변신
선교사 신부 수장시켜
1615년 5월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동안 마음에 가시처럼 박혀있던 오사카 성의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후계자 히데요리(秀賴)의 존재를 없애버렸다. 오사카 성을 함락하고 후계자 히데타다(秀忠)에게 통일정권을 물려주었으며, 그리스도교를 배척하도록 늘 말해왔다.
1616년 7월 이에야스는 즐기던 사냥을 나갔다가 넘어졌다. 그는 평소에 숙원했던 자신의 신격화를 유언하면서 슨뿌 성에서 죽었다. 닛코 야마(日光山)의 도쇼 다이곤겐(東照大權現=신격화)으로 모셔졌다. 그의 뒤를 이은 히데타다 장군은 신년하례를 받는 자리에서 기리시탄 박해를 명하였다.
1617년 정월, 오무라의 영주 스미요리는 에도 새 장군에게 새해 인사를 갔다. 영주는 장군으로부터 영내에 선교사가 잠복해 있다고 힐책을 당하자, 신앙을 포기하고 박해자로 변신하였다.
공공연히 포교를 하고 있던 아우구스티노회 관구장 에르난드 신부와 도미니코회 관구장 나바렛트 신부는 배교자 오무라 영주에게 회심하도록 권하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침식을 잊고 설교와 옥외 미사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열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소식을 들은 영주는 두 신부를 체포하여 스즈다(鈴田) 옥에 넣었다. 1617년 6월에 두 신부를 멀리 떨어진 무인도 다카시마에서 몰래 수장시켰다. 그러나 형리 중 한 사람이 기리시탄이었기에 감동을 받고 교회에 보고하였다.
조선인 아리조와 고사쿠
1619년 7월 19일 오무라에서 조선인 베드로 아리조와 도마 고사쿠(小作)가 순교의 영광을 받았다. 이들은 오무라의 스즈다 감옥에 있는 신부들에게 약간의 참외를 보내준 것 때문에 천국을 얻었다.
베드로 아리조는 28세의 조선인이었다. 오랫동안 영주의 집사로 일했는데 선량하고 온화하며 신중하여 총애를 받아왔다. 성내의 많은 미 신자들 가운데에서도 신앙생활에 열의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악습에도 물듦이 없었다. 그는 「로자리오회」 회원이고 신심회 회장이었다. 스즈다 감옥에 있는 두 신부가 굶주림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을 알고 마음이 아팠다. 어느 날 밭에서 잘 익은 참외를 따 감옥에 보내주기로 하였다. 선량한 조선인 도마 고사쿠가 다른 물건도 감옥에 가지고 가서 넣어주곤하였기에 그에게 의뢰하였다.
도마 고사쿠가 참외를 가지고 감옥에 도착하였지만 감시인에게 발각되었다. 도망을 갈 수 있었음에도 고사쿠는 그냥 그대로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즉시 체포되어 영주 앞에 연행되었다. 영주는 아리조와 고사쿠를 재판에 넘겼다. 『기리시탄을 버려라』 했지만 열심한 로자리오 회원인 그들은 「잠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영원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에게는 설득도 간원도 위협도 쓸모없었다. 영주는 참수를 명했다. 성 내 깊숙한 곳에서 1619년 7월 19일 금요일 거룩한 영혼들은 하느님께 바쳐졌다.
이들의 처자식들은 남편과 같이 순교하기를 원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영주는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박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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