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 숙식 돌보던 조선인 신자 화형 당해
기리시탄의 도시
1569년 나가사키에 「모든 성인의 교회」가 세워지고 나서부터 1614년까지 45년간 나가사키는 일본의 서양 문화와 평화의 중심지였다. 주민 5만 명 대부분이 기리시탄이었다. 각 수도회와 교구 사제는 신심회를 조직하여 교회마다 신자가 넘쳤다. 길거리에는 기도소리와 찬미가가 울려 퍼지고 난반(南蠻=포르투갈, 네덜란드)풍의 의상과 음식, 주거가 유행이었다.
나가사키에는 13개의 교회와 예수회의 주교좌 성당, 대신학교, 소신학교, 인쇄소가 있었다. 복지사업으로 나병환자시설, 고아원, 양로원도 있었다. 미망인과 가난한 자의 구제와 장례 등 그리스도교적 애덕을 실천하는 「자비의 형제회」는 나가사키를 기리시탄의 도시로 특색지었다.
1614년 전국적 박해가 시작되고 영주의 배교로 나가사키의 니시사카(西坂)는 일본 최대의 순교지가 되어 그야말로 기리시탄 도시가 되었다. 여기서 순교한 660명 중에서 26위가 시성된 것을 비롯하여 148위가 시복되었다. 조선인 순교자도 거의 니시사카에서 순교하였다.
순교복자 조선인 코스메 다케야
조선인 다케야(竹屋)는 임진왜란 때 11세의 소년으로 포로가 되어 일본에 연행되어왔다. 구루미(久留米)의 어떤 부잣집에서 오랫동안 충실히 봉사하였기 때문에 그 주인은 다케야를 신임하여 자유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가사키에 있는 다수의 집과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주어 살게 하였다. 그는 여기서 세례를 받고 「누메로 로자리오회=순교를 각오한 신심회」의 회원이 되어 도미니코회 모든 선교사들의 숙주(宿主)가 되었다.
다케야는 이해력이 매우 뛰어나고 과묵했으며 용덕과 사랑이 깊은 사람이었다. 자신과 가족, 풍부한 재산에 미치는 위험도 돌아보지 않고 신부들의 잠복사목을 돌보며 교우들의 미사참례와 성사생활을 도왔다.
1618년 8월 중순, 도미니코회의 산토 도미니코 신부와 훼레루 오르스치 신부가 나가사키에 상륙하여 조선인 기리시탄 다케야의 집에 잠복하여 일본어를 배우고 있었다.
12월 13일 심야, 포졸들이 다케야의 집을 덮쳐 두 신부와 5인조의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또 다른 곳에서는 모라레스 신부와 안드레아 무라야마 도쿠안(나가사키 지방관리의 아들) 등이 체포되었다. 신부들은 스즈다 감옥에, 다케야와 다른 사람들은 나가사키 감옥에 갇혔다.
신부들의 숙주인 조선인 코스메 다케야와 무라야마 도쿠안, 요시다 소운 등과 예수회 수사 레오날드 기무라는 화형이 선고됐다. 사형장은 나가사키의 니시사카였다.
사형장에 도착한 이들은 각각의 십자가 밑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묶였으며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다. 화형은 배교를 종용하기 위하여 언제나 살아 있는 가운데 나무에 물을 뿌려 천천히 태우게 하였다.
순교자 일동은 모두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천상의 기쁨에 넘쳐 있었다. 순교자들의 유골은 재가 되어 모두 바다에 버려졌다. 1619년 11월 18일 이었다.
박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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