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지나치면 오히려 혼란에 빠질 수 있고, 좋은 것도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다. 그뿐인가, 머리를 잘못 쓰면 자기가 판 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처형하기 위해 만든 말뚝에 결국 자신의 머리를 달게 된다. 자초한 죽음이었고 스스로 준비한 결과였다.
에스델서가 제시하는 하느님의 지혜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무엇이든 지나치지 말 것, 오버하지 말 것, 이기심과 잔꾀의 한계를, 그리고 그 마지막을 언제나 기억할 것, 적어도 자기가 판 구덩이에는 빠지지 말 것.
7장, 하만의 최후
왕과 하만은 에스델의 두 번째 초대에 응하게 되고, 기분이 좋아진 왕은 왕비의 소원을 묻는다(1~2절). 이에 그녀는 자신과 민족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애원하는데(3절), 감히 왕비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고(5절) 더구나 그가 하만임을 알게 된 왕은 격분하여 밖으로 나간다. 궁지에 몰린 하만은 에스델에게 살려줄 것을 애원하는데(6~7절), 물론 아직까지 왕과 하만이 왕비의 국적을 모르고 있었다는 본문의 설정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만이 이를 알았더라면, 그리고 모르드개가 에스델의 양부였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런 음모를 꾸미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돌아온 왕은 결정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하만이 왕비의 침대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왕은 이를 하만이 왕비를 폭행하는 것으로 알고, 격노를 터뜨린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하만의 위상을 완전히 추락시켜 놓는다. 결국 하만은 『얼굴을 가리게』 되는데, 이는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에게 가해지는 행위였다. 하만은 그가 세워놓은 높이 쉰자의 말뚝에 달리는 것으로 최후를 맞는다(9~10절).
8장, 새로운 칙령
이후 왕은 왕비에게 『유다인들의 적』 하만의 집을 하사하고, 모르드개가 에스델의 양아버지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1~2절). 그러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하만에 의해 반포된 유다인 학살 칙령은 유효한 것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델은 왕에게 이 칙령을 취소하기를 간청하지만(3~6절), 이미 공포된 칙령은 취소할 수 없다는 페르시아의 법이 걸림돌이 된다. 결국 왕은 유다인들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칙령을 작성할 것을 모르드개에게 제안한다(8절).
이렇게 해서 작성된 두 번째 칙령은, 유다인들이 자신들을 몰살하려는 세력에 적극 대응하는 것을 윤허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유다인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의 칙령이 되는데, 하만의 처형 이후, 페르시아의 실세로 부상한 인물은 모르드개였고, 그가 유다인인 이상 유다인들에게 대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15~17절).
물론 이러한 일들이 실제 역사적으로 발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유다인들의 위상은 에스델서 저자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클라인즈(D. Clines) 같은 학자들은 기쁨에 겨워하는 유다인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래적인 에스델서가 마무리 된다고 본다. 다음에 등장하는 9, 1~10, 3는 후대 첨가된 부분이라는 것이다.
9장~10장, 유다인들의 승리
이제 이야기의 흐름은 완전히 반전된다. 멸절 당하게 될 바로 그날이, 유다인들에게는 적을 무찌르는 「역전의 날」이 되었기 때문이다(1~2절). 에스델은 그 칙령의 시효기간을 다음날까지 연장할 것을 청하고(13~14절), 유다인들의 승리가 확실해 지자 모르드개는 해마다 이날들(아달월(2월경) 십사일과 십오일)을 축일로 지내기를 공포한다(20~21절). 물론 많은 주석가들은 이러한 보도가 부림절의 기원을 설명한 것으로 이해한다. 부림절은 원래 바빌론의 풍습에서 기원한 것이지만 이스라엘 민족 안에 이미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던 이야기를 함께 혼합함으로써, 이 축제를 자신들의 것으로 토착화 했다고 보는 것이다. 특별히 9, 23~28은 이 부림절의 기원과 내력을 요약하고 있다. 에스델서는, 모르드개야말로 진정한 유다인이요 하느님 백성의 모범이었음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종결된다(10, 1~3).
일상의 분노와 폭력
신문지상에 연일 보도되는 연쇄살인 사건들은 일상의 작은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 폭력을 야기 시키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모르드개를 향한 하만의 분노는, 사실 각박해져만 가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부딪침」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은 언제나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내편에서는 크고 작은 분노와 섭섭함을 느낄 수밖에 없고, 결국 타인과의 관계는 언제나 낯설고 불편한 것으로 남아있게 된다.
뻔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결국 이를 극복할 대안은 하나뿐이다. 하느님의 눈으로 타인을 받아들일 것, 그래서 그의 다름을 능동적으로 존중할 것,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그저 무거움과 감당할 수 없는 속박으로 다가올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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