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여자 신고로 잡혀 십자가 안고 불타 죽어
조선인 순교 복자 안토니오 가족
조선인 다케야(竹屋)가 체포되던 날, 다른 곳에서도 일본인 최초의 신부 세바스티아노 기무라와 그의 숙주(宿主) 조선인 안토니오와 그의 가족, 그리고 다케야의 부인 아녜스 등 55명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1622년(갠나 8년) 9월 10일 니시사카 사형장에는 십자가와 장작더미가 준비되어 있었다. 십자가에는 조선인 안토니오와 기무라 신부, 스피노라 신부 등 25명이 모두 묶여있었다. 장작더미에 불이 점화되었다. 화형은 언제나 배교할 시간을 주기 위하여 천천히 태워져 더욱 고생하는 것이다. 기무라 신부는 3시간동안 몸 한번 움직이지 않더니 고개를 숙였다. 조선인 안토니오는 오랏줄이 불에 타 풀리자 십자가를 안은 채 숨을 거두었다.
그 옆에는 참수를 선고 받은 조선인 안토니오의 부인 마리아와 아들 3세의 베드로, 12세의 요한 그리고 조선인 코스메 다케야의 부인 아녜스와 나가사키 지방관의 며느리 마리아가 있었다. 참수형이 시작되었다. 옆의 어머니의 머리가 자기 앞에 떨어지는 것을 본 아이는 아무 두려움 없이 스스로 머리를 형리 앞에 내 놓았다.
대 순교가 있었던 다음 날 조선인 다케야의 아들 프란치스코(12세.복자)가 순교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아버지가 순교한 후, 어머니 아녜스도 감옥에 갇혔고 재산은 몰수되어 어떤 기리시탄 무사의 양자로 가 있었다. 형리는 이 소년을 자기의 양자로 하려하였으나 프란치스코는 이를 거절하고 목을 내 놓았다. 순교자들의 유골은 2일간 불에 태워 재로 되었고 피가 묻은 흙까지 파 모아서 바다에 던져졌다. 먼지 한 톨도 남기지 않기 위하여 이를 운반한 선장은 나체로 헤엄을 쳐 나오게 하였다. 잔학한 폭군은 순교자들의 유골이 신자들의 손에 넘어가 공경의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코라이 안토니오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대단히 존경하고 있었다. 일본인 최초의 신부 예수회 세바스티아노 기무라의 숙주로 잠복사목을 돕고 있었다.
1621년 9월 어느 날 노예였던 조선인 여자가 상금에 탐이 나서 신부를 고발하였다. 이 여자는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렸는데 코라이 안토니오가 이 여자를 사서 자유로이 살게 해주었다. 고발된 기무라 신부와 조선인 안토니오와 가족들이 체포되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재산이 몰수 될 때, 안토니오는 그 여자를 재산 목록에서 빼내주기를 부탁하였다. 만약 재산 목록에 실려 있으면 나라의 노예가 되어 평생 혹독한 운명에 처하기 때문이다.
일본인 최초의 신부 복자 세바스티아노 기무라(木村)는 하비에르 신부가 히라도에서 세례를 준 숙주 기무라의 손자이다.
1584년에 예수회에 입회하고 수도서원을 한뒤 1601년 9월 21일 일본인 최초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일본문학에 정통하고 설교에 뛰어났다. 1614년 추방령 때 나가사키에 잠복하여 조선인 안토니오 집에서 기리시탄들을 지도하고 있던 중, 안토니오와 함께 체포되어 니시사카에서 순교하였다.
박양자 수녀 <갠나 대순교(그림)때 조선인 안토니오 가족이 순교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