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3년 전까지 만해도 거의 매일 한강을 보면서 통학하거나 출근을 해서인지, 지금도 한강을 보면 늘 반가운 마음이 든다. 그런데 내가 본 것은 그저 한강의 화려한 외형이었을 뿐, 그 자체를 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번 봄 소풍 때 우연히 앉게 된 작은 개울가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늦게서야, 남들 다 아는 진리를 깨닫는다는게 나 자신에게는 고통이지만, 더 늦기 전에 알려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기로 했다. 다분히 촌스러운 이야기가 되겠지만, 거기서 나는 『삶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아무리 무시무시하고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도 살다보면 다 흘러가는 것이라고, 그렇게 상처와 흉터를 가지고도 삶은 계속되는 것이라고, 돌돌돌 깨끗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던 작은 강은 내게 조용히 말해주었던 것이다.
다니엘은 파란만장한 역경을 거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앙으로 그 많은 우여곡절을 극복해 낸다. 마침내 최고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고통의 순간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저자문제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
다니엘서는 다니엘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두 가지 다른 방식의 보도를 하고 있다. 1~6장에서는 다니엘을 「그-3인칭시점」에서 소개하고 있지만 후반부인 7~12장에서는 「나-1인칭 시점」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책이 언급하는 「나」를 책의 저자로 간주했고, 「나」는 기원전 6세기,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바로 그 「다니엘」인 것으로 생각해왔다. 이 같은 교회의 해석은 초세기 교부들로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정설처럼 군림하여온 입장인데, 이와 다른 주장을 편 학자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로니모는 「다니엘서 주석」이라는 저서에 포르피리(Porphyry)의 증언을 인용하면서, 다니엘서는 기원전 6세기의 작품이 아니라, 기원전 2세기의 작품이라는 것을 명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2세기 제작설에 대하여
앞에서 제시된 포르피리의 증언은 다니엘서의 저자를 기원전 2세기경의 인물로 주장하고 그 시기에 책이 저작되었음을 제시한다. 다니엘서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시기는 바빌론 유배시기(기원전 6세기)이지만 이는 그저 이야기의 배경이었을 뿐, 실제 제작된 것은 그보다 400년 후인 안티오쿠스 박해 때(기원전 2세기)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즉, 2005년에 저술된 저서라고 해서 꼭 현대적 배경의 이야기와 소재만을 고집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시대극들이 동시대를 살고 있는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단순히 그 먼 옛날의 사회-생활을 보도하는 「다큐멘터리성」 기능만을 수행하지 않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메시지를 실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서라는 시대극(?)을 읽으며 놓쳐서는 안되는 점이 있다면, 바빌론 유배라는 기원전 6세기의 배경 속에 숨겨져 있는, 그러나 400년 후인 기원전 2세기 독자들에게 반드시 부각시키고자 했던 메시지, 바로 그것을 알아내는 일일 것이다.
다니엘서가 기원전 2세기경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뒷받침 해주는 단서들은 다니엘서 자체가 암시하고 있는 내용들 안에서도 발견된다. 10~12장이 묘사하고 있는 정치-사회적 상황들은 기원전 2세기 중반, 근동 지역과 팔레스틴 지역의 정황을 상징적으로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 시대를 살았고, 당시 주변정세에 매우 박식했던 인물이 아니라면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었을 정치-사회적 혜안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기원전 190~180년경에 저술된 집회서의 예언자들 목록에 다니엘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 반면 134~104년 사이에 저술된 마카베오 상권의 저자는 다니엘서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다니엘서의 2세기 저작설을 뒤받침하고 있다. 특별히 다니엘서의 내용이 안티오쿠스에 의한 성전 유린(기원전 167년 11, 31참조)과 박해(11, 33), 그리고 마카베오가의 성전정화(164년 11, 34참조)에 대하여는 잘 보도하고 있지만, 안티오쿠스의 죽음(164년)에 대해서는 정확히 묘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다니엘서의 최종 편집 연대를 안티오쿠스 왕의 죽음 즈음, 혹은 죽음 직전인 기원전 164년경으로 추정하게 한다.
절망을 극복하는 법
요즘 너무 재미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일부러 본 드라마가 있는데, 거기서 유독 내 눈길을 끌었던 인물은 말 못하는 꼬마 아가씨였다. 원래 말을 못하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말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아픔과 절망이 그 아이의 마음을 삼켜 버린 것일까…. 드라마지만 그게 자꾸 내 마음을 붙잡았다.
절망은 우리를 삼켜버릴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을 정복하지는 못한다. 우리에게 신앙이 필요한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이유이다. 절망을 극복하는 법, 앞으로 다니엘서를 읽어가면서 배울 수 있는 지혜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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