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교자가 고발하자 신부부터 피신시켜
1623년 8월에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가 에도막부 제3대 장군이 되었다. 그는 재직 30년간 철저한 금교정책과 쇄국정책을 취하였다. 이는 도쿠가와 정권유지를 위한 봉건제 유지와 가장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기리시탄 사상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이에미츠 장군은 취임하자마자 에도에 안젤리스(H.Angelis.복자) 신부와 가르베스(F.Galvez.복자) 신부가 잠복해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격노하여 『탐색을 엄중히 해서 체포 처형하라』고 불같은 명령을 내렸다. 당시 일본 내에는 30여명의 선교사가 잠복하여 신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조선인 레오 다케야 곤시치
안젤리스 신부는 슨뿌를 중심으로 에도 이곳저곳으로 순회 전도를 하며 잠복을 계속하고 있었다. 신부의 숙주는 조선인 레오 타케야 곤시치(理安竹屋 權七)였다. 1623년 10월말 배교자가 상금에 눈이 어두워 밀고하였다. 이 배교자는 슨뿌성의 고급무사 죠안 하라몬도(原主水)의 부하였다.
하라몬드는 모레혼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슨뿌성에서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1612년 검색 때 기리시탄을 버리지 않아 추방되었다. 그 후 다시 체포되어 손발가락이 잘리고 다리 힘줄이 절단되고 이마에는 십자가의 낙인이 찍혀 쫓겨나 산속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회의 아사쿠사 나병환자 수용소에 있을 때 부하의 3번째 밀고로 체포되었던 것이다.
레오 다케야는 밀고 당한 것을 알고 신부를 사전에 피신시켰다. 레오는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은 기리시탄임을 분명히 하였지만, 신부의 행방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안젤리스 신부는 더 이상 신도들이 다치지 않도록 자수하여 에도 감옥에 갇혔다.
「에도의 감옥」의 당시 상황을 티에고 산프란치스코 신부의 체험 보고서에서 보면, 「옥내는 심히 좁고, 천정은 낮고 어두우며 입구라고 하는 것이 관 하나가 겨우 들어올 수 있는 창하나 밖에 없었다. 악취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병에 걸려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누워있는 곳에서 용변을 보기 때문이다. 옆사람은 이 악취뿐만 아니라 오물이 몸에 묻어 그 고통이 심한 나머지, 병자의 머리를 기둥에 때리기도 하고 목을 졸라 매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고통을 견디는 것보다 죽는 편이 낫다하여 자살하는 자도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물 한 컵만 주기 때문에 굶어 죽는 자가 많았다. 신부가 세례를 주기 위하여 아껴놓은 물을 빼앗아 마시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관리의 허락 없이는 시체를 밖으로 내어 갈 수 없어서 7~8일간이나 그냥 둬야하는 것이었다. 부패하여 썩은 핏물이 나와 옆사람에게 번져나갔다. 몸에 종기가 생기고 귀에서는 고름이 나오고 무릎과 손발이 부어오르고 손발가락이 썩어 떨어져 나갔다. 그 무서운 악취에 감옥 내의 사람은 고문을 당하듯이 울부짖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박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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