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지 않고 믿는 이가 더 행복하다”
오늘의 복음말씀 요지는 예수께서 당신이 누구시며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계시하셨지만,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반면 철부지 어린 아이들과 우둔한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자기의 지식과 지혜를 너무 과신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들을 자기의 지식과 지혜로 해결하려고 하고 자기의 지식과 지혜로 납득이 안되는 것은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드님과 그분의 아버지는 신앙의 대상이지 인간의 지혜나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신앙의 대상은 육안의 대상이 아니고 영안의 대상이건만 똑똑하다는 사람들과 안다는 사람들은 육안으로 보려고 하다가 보이지 않으면 거부해 버린다.
육안으로 볼 때 예수님은 시골 나자렛에서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자라나 별로 공부도 못한 촌뜨기에 불과하다. 하느님은 신령하시기 때문에 분해하고 조립하고 어느 공간에 가두어 둘 수 없는 분인데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게 하려들다가 뜻대로 안될 때에는 하느님을 거부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분석하고 조립한 엉뚱한 신을 만들어 놓고는 이것이 우리의 신이다 라고 하기도 한다. 마치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우리의 하느님이다 라고 영광하던 것 처럼 말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러시아 최초의 우주 비행사인 가가린 소령은 지구를 몇바귀 돌고 귀환해서 하는 말이 우주를 아무리 살펴 보아도 하느님은 보이지 않더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후에 미국 최초의 우주 비행사는 지구를 돌고 귀환한 다음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주가 그렇게 아름다운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고 했다. 똑같은 우주 비행을 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 것은 육안만 가지고 바라본 사람과 육안과 함께 영안을 가지고 바라본 사람이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앙은 은총이지 지식이 아니다. 지식은 머리의 대상이지만 신앙은 가슴의 대상이다. 하느님과 그분의 심오한 진리는 성령의 조명과 인도가 없이는 깨달을 수 가 없다.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될 수 있도록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 같이 모든 사람의 머리와 가슴을 당신의 빛으로 비추어 주시고 당신의 은사와 열매들을 쏟아 부우시지만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교만의 벽이 너무 두껍고 굳어져서 성령의 빛이 뚫고 들어 가지 못하고 성령의 은사와 열매들을 받아들일 자세가 안돼 있어 옆으로 모두 흘려 버린다.
그것은 마치 뾰족한 바위 위에도 똑같은 양의 비가 내리건만 그 비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아 자기 위에 떨어진 비를 전부 놓치고 마는 바위와 같고, 살아 있는 초목에도 죽어있는 초목에도 똑같이 햇볕은 비추지만 살아 있는 초목만이 햇볕의 혜택을 누려 무성히 자라고 꽃과 열매를 맺는데 반해 죽은 초목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거부하고 박해하고 잡아 죽인 사람들은 그 당시에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인 사제들과 신학자들이었다.
인간적인 지식과 지혜는 때때로 영적인 눈을 어둡게 하여 눈뜬 장님을 만든다. 이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렁에 빠지게될 확률이 많다. 세속적인 지식과 지혜로 머리가 가득찬 사람들은 교만해지기 쉽고 교만한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싫어 하시어 하느님과 점점 멀어질 뿐 아니라 자기의 꾀에 자기가 당하는 경우도 많다.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늘에 보다더 높은 바벨탑을 쌓겠다고 시도했다가 언어만 분열되고 결국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고, 모르드게를 매달아 죽이려고 높은 장대를 세웠으나 그 장대에 도리어 자기의 목이 달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하만이 그랬고, 죄수를 죽이는 형구인 길로친을 발명한 사람이 자기가 발명한 길로친에 목이 잘린 어처구니 없는 일들에 바로 그런 것 들이다.
사도 토마는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다른 사도들에게 『나는 나의 손가락을 그분의 손바닥에 있는 못구멍에, 내 손바닥을 그분의 옆구리에 있는 창구멍에 넣어 보기 전에는 결코 못믿겠다』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발현하시어 네가 원하는 대로 확인해보고 의심말고 믿으라고 하시고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으니 보지 않고 믿는 이가 더욱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우리는 지혜로운 지식인이 되지 말고 바보스런 신앙인이 되자.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상담〉
말씀 안에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