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이 토막 나도 배교않고 참수 순교
1623년 12월 4일, 에도 감옥에 있던 기리시탄 50명은 묶인채 관습대로 시내의 번잡한 곳을 둘러 형장으로 갔다. 안젤리스 신부가 말에 타고 선고문을 등에 달아 선두에 섰다. 이어 조선인 레오 다케야 곤시치(竹屋權七), 가르베스 신부, 손발가락이 잘린 하라몬도가 뒤따랐다.
형장은 사람의 왕래가 많은 에도에 들어가는 동해에 면한 작은 언덕인 후다노즈치(高輪)였다. 두 신부는 군중을 향하여 설교를 하였다. 이 때 감격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귀인(영주?)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군중을 헤쳐 형리들 앞에 나타나 물었다. 『왜 이 사람들이 형을 받고 있는가?』 형리는 이들은 기리시탄이라고 대답하였다. 『나 역시 기리시탄이다. 그들과 같은 운명에 동참하고 싶다』라고 말하자 형리는 즉시 그를 체포하였다. 그러자 그의 가신 5명과 300명의 군사가 형리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우리 모두 기리시탄이니 처형을 받겠다』고 하였다. 형리들은 소동이 두려워 그들을 쫓아내고 서둘러 처형을 시작했다.
50개의 십자가 밑에는 장작더미가 준비되어 있었다. 신부들에게는 제자와 신도들이 살아있는 채 당하는 화형의 고통을 눈앞에서 보게 하였다. 신자들이 장하게 순교하는 것을 보고 신부들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린 다음 형을 받았다.
50인의 순교자 중 현재 이름이 알려져 있는 자는 37명뿐이다. 순교자의 이름은 십가가의 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죠안 하라몬도, 예로니모 안젤리스 신부, 프란치스코 가르베스 신부, 조선인 레오 다케야 곤시치 순으로 되어 있다.
그해 12월 29일에는 순교한 기리시탄 가족들을 숨겨준 37명의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이 중에는 이교도들도 13명이 있었는데 연좌 벌로 처형되었다. 순교자 중에 조선인 다케야 곤시치의 모친 마리아는 특히 뛰어났다. 이 부인은 위협에도, 달콤한 말에도, 당연히 가족들에게 미칠 치욕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아무리 혹독한 것이라도 이 순교는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녀는 말위에 묶여져 선두에 섰다. 형리들은 부인들이 배교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눈앞에서 자기 아이들의 목이 떨어지고, 몸이 토막토막 잘려지는 것을 보게 하였다. 그러나 부인들은 모두 오직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참수로 순교하였다.
레오 다케야 곤시치는 귀화 조선인 야자에몽의 아들이었다. 부친은 당시 일본 최대의 대학 아시가카(足利) 학교의 교장을 주지로 하는 시바무라(芝村)의 장덕사의 신도이며, 주지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레오의 어머니 마리아와 처 루시아도 일찍부터 기리시탄에 귀의하고 있었다. 레오에 대한 기록이 쿠랏세의 「일본서교사」에는 「레오 다케야 곤시치」 또는 「레오 바쿠시(朴氏) 곤노시아」로 소개되어있다.
레오 다케야의 부인 루시아는 시바무라 영주의 딸로서 당시 18세였다. 부인도 같이 체포되어 에도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그 후 그녀는 남편이 기리시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결혼하였다는 장덕사 주지승의 보증 서찰로 석방되었다.
박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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