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십시오”
오늘 복음말씀의 핵심은 「하늘 나라」이다. 예수께서는 이 하늘 나라를 가라지의 비유로, 겨자씨의 비유로, 누룩의 비유로 설명하시지만 이것들 외에도 다른 비유로도 많이 설명하셨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메시지는 한마디로 「하늘 나라」이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회개하십시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하고 전파하셨다(마태 4, 19).
그러면 「하늘 나라」 대신에 「하느님 나라」로 기록하였음을 볼 때, 예수께서 실제로 쓰신 말씀은 「하느님 나라」였는데 마태오는 경외심에서 나온 랍비들의 관습에 따라 「하느님」 대신에 「하늘」이라는 표현을 하다보니 「하늘 나라」로 표현했다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을 왕으로 모시는 어떤 영토가 아니라 하느님의 왕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왕권」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의 지배」 혹은 「하느님의 주권」이라고 해도 훌륭한 번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청중들에게 풍부한 의미가 있었다. 병자에게 「건강」과 같이, 전쟁민에게 「평화」와 같이, 설명할 필요도 없는 말이었다. 누구나 그 성취를 갈망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여러 형태로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이 온 세상에 개입하심을 알리고자 했지만, 「세상의 종말」이 하느님 나라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과 일치한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았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어떤 외적인 사건이 아닌, 하느님의 지배라는 사실에 힘있게 집중되어 있다. 즉 하느님의 지배가 이미 시작됐음을 알려주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님의 업적과 설교안에 있다.
묵시적 환상가들은 외적인 사건과 사물을 운운하는 반면, 예수께서는 무슨 먼 환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친히 하느님 나라를 갖고 오신다. 그리고 그 나라 한 가운데 서서 악의 세력이라는 또 하나의 나라와 싸우고 계신다. 『내가 하느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여러분에게 임한 것입니다』(루가 11, 20).
예수께서는 정확한 날짜를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신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할 수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루가 17, 20~21).
국가의 부흥도, 하늘의 징표도 없다. 오직 인간 세계의 평범한 일상생활 안에 하느님과 하늘의 그 무엇이 감추어져 있을 따름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것을 가르치실 때처럼, 하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실 때에도 비유를 써서 말씀하셨다.
비유한 예를 들어 무엇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율법학자들도 비유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매우 특이하다. 율법학자들의 비유는 기존 율법을 설명하는 수단이었으나, 예수님의 비유는 그 자체가 메시지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생활의 단순 명쾌한 사례들이다. 예수께서는 비유끝에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십시오』하고 외치신다.
비유를 알아듣는 데는 거기에 감추어진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자기를 헌신하고 회개하려는 내적인 자세가 불가결하게 요구된다. 이런 자세가 없는 사람은 그저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비유를 못 알아듣는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 밖에 있다는 것이다. 알아듣기 위한 비유가 질책의 표징이 된다.
오늘의 복음말씀 내용으로 돌아가 보자. 밭에 뿌린 씨는 밀이었는데 뿌리지도 않은 가라지가 함께 자라서 밀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이고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학교에서도, 가정안에서도, 내 자신안에서도 일어나는 일이어서, 우리 모두는 이 불가사이하고 거대하고 강력한 악의 세력과 끊임없는 전쟁을 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지키고 있지 않은가?
또 하느님의 나라가 모든 씨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겨자씨를 밭에 뿌려서 공중의 새들이 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한 나무로 성장하는 것에 비유하시고, 또한 여인이 한줌의 누룩을 서말이나 되는 밀가루 속에 넣어 온덩이를 부풀게 하는 것에 비유하신 것은, 시작과 마지막 사이에 놀라운 대조를 이루는, 일상중에 흔히 있는 예를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처음에는 보잘 것 없이 보인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예수께서는 실질적으로 외적인 장관을 이루어 사람들을 현혹시키려 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의 행동은 평범했다. 무슨 거창한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역시 종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었다.
허성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상담〉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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