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최고의 경영주로 부각되면서 한 시절을 풍미했던 유명그룹의 총수가 너무도 평범한 모습이 되어, 아니 피곤함과 두려움을 가득 담은 얼굴로 귀국했던 것을 기억한다.
몇 세기에 나올까 말까한 천재라 해도,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재능과 미모를 가졌다 해도, 그래서 남들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자리에 올라 최고의 권력과 힘으로 세상의 중심에 당당히 섰던 이라 해도, 그것은 언제나 「잠깐」이고 「찰나」의 영광일 뿐이다. 그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쓸쓸한 퇴장에서 제외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상이 화려하고 극적일수록, 퇴장은 쓸쓸하고 고독했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서 모든 것의 「오너」가 되었다면, 언젠가는 「루저」가 될 것을 예상해야 하는 것, 결코 낯설지 않은 인생의 시나리오인 것이다.
다니엘서는 당대 최고의 권력이었던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불사조 같은 그였지만, 세상의 중심에서 자신의 존재를 외쳤던 것은, 인류의 긴 역사에서 본다면 그저 찰나였을 뿐이다. 최고가 된다는 것,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지만, 그 다음을 감당하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일 것 같다. 언제나 절망적으로만 여겨지던 나의 무능함도 그러고 보니 신통하고 다행한 구석이 있었네…. 그걸 모르고 있었던거네….
다니엘서 1장
다니엘서의 1장과 7장은 각기 전반부와 후반부의 서론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별히 다니엘서 1장은 유다인이었던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이 어떻게 해서 바빌론 궁정 안에까지 들어와 활동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포로로 끌려간 그들이 어떻게 해서 당대 최고 엘리트 대열에 들 수 있었는지, 그 경위를 설명해 준다.
개괄적 서론(1~2절)
1) 하느님의 전권
이 부분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서론으로서, 바빌론왕 느부갓네살(기원전 605~561년)이 우선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다니엘이라는 인물의 등장에 앞서, 이미 바빌론의 왕을 소개하고 있음은 나름대로 저자의 신학적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보여 지는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이룩하고, 그 나라를 지상천국으로 만들겠다던 바빌론의 대왕 느부갓네살은 당시 지상에 존재하던 가장 강력한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권세라 하더라도 다니엘서의 저자에게는 분명한 한계를 가진 것이었다. 다니엘서의 제작연대를 기원전 2세기로 보는데 동의한다면 저자는 찬란했던 바빌론 왕국의 종말과 그 허무한 최후(기원전 538년)를 이미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었던 것이고, 지상의 권력이 결코 영원하지 못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느부갓네살이 상징하는 지상적 권력은 사실상 하느님께서 잠정적으로 부여하신, 즉 하느님께 종속된 하위 권력에 불과한 것임을 저자는 이를 통해 이미 암시하고 있다.
2) 역사적 문제
다니엘서의 1, 1은 그 연대기적 문제 때문에 많은 학자들의 논쟁을 불러일으켜 왔다. 왜냐하면 보도된 이야기가 실제 상황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절은 여호야킴 3년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침입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여호야킴 3년이라면 기원전 606년이고, 이 시기 바빌론의 느브갓네살은 아직 왕위에 오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니엘의 이러한 문제는 2역대 36, 5~7의 오류적 보도를 그대로 적용한 탓으로 보여 진다. 결국 이러한 균열들은, 다니엘 1장이 유배와 그에 따른 여러 역사적 정황을 정확히 보도하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음을 드러낸다. 성서가 신학적 산물이지 역사적 보도가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3) 유배는 하느님의 심판
2절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성전을 유린하고 기물들을 노획하였다」고 보도함으로써, 성전파괴라는 가슴 아픈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2절은 문장의 주어를 『주님께서』로 명기함으로써, 예루살렘과 성전 파괴는 느부갓네살에 의한 패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인 것으로, 즉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의도적 체벌로 표명하고 있다.
권력에 대하여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성서는, 권력쟁취 혹은 권력에 대한 집착을 본질적으로 거부한다. 인간사의 크고 작은 승패는 모두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결정되는 것이고, 따라서 유일한 권력자는 하느님 한분뿐이시라고 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집착하고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 있다. 자신의 욕망과 야심 때문에 세상과 전면 대결구도에 들어가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때, 삶은 의외로 쉽게 안정될 수 있다.
소박하고 억지가 없는 삶, 궤변과 변명이 필요 없는 정직한 삶, 가장 강한 자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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