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껴안고 불길속에서 순교
예수회 수사 복자 가이오
조선인 가이오(Caius)는 1614년 마닐라로 추방되었다가 우콘이 선종하자 나가사키에 다시 상륙하였다. 조선인 기리시탄의 집에 거처를 정하고 교회에 봉사하고 있었다.
1623년 프로레스 신부 유체 이장사건으로 체포된 베드로 바스케스 신부와 숙주 고이치가 감옥에 갇혀있었다. 엄한 감시가 펼쳐져 근처에 가기만 해도 곤봉으로 맞을 정도였다. 가이오는 전혀 두려움 없이 바스케스 신부를 만나러 갔다가 투옥되어 순교의 날을 기다리며 단식과 기도, 고행으로 1년 이상 지냈다.
1624년 11월 15일 가이오와 고이치는 형장으로 끌려갔다. 십자가에 왼손만 묶어 두어 불에서 도망할 수 있게, 아니면 허덕이는 모양을 보고 웃음거리가 되도록 하였다. 가이오의 오랏줄이 불에 타 풀렸다. 불길과 연기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다시 십자가를 안았다. 마침내 땅에 넘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이 보고서를 쓴 로드리게스 지람 신부는 「한 사람은 사회에서 매우 경멸되어 온 조선인이고, 한 사람은 전혀 인정해 주지 않는 가난한 백성이었다. 이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신앙이 얼마나 큰 영광을…」이라고 말하고 있다. 조선인 가이오와 고이치의 유골은 바다에 버려졌다.
예수회 메디나 신부는 가이오가 예수회 최초의 조선인 수사임을 말하고 있다. 당시 박해중이라 입회서류 작성이 무리였고 가이오에게 전달되지 않은 채 순교하였다고….
예수회 수사 복자 빈센트 가운
당시 일본 예수회 관구장인 프란치스코 빠체코는 구치노쯔에 전도소를 두었다. 1625년 12월 배교자의 밀고로 구치노쯔에 잠복해 있던 조라 신부와 반려자인 조선인 빈센트 가운(加運), 숙주인 요한네 나이센이 체포되어 시마바라 감옥에 갇혔다. 빈센트는 벌거숭이가 되어 손가락이 잘리는 등 14일간 고문을 계속 받았다. 그는 예수회 전도사로 일해 온지 33년, 감옥에서 예수회 관구장 빠체코 신부 앞에서 염원하던 예수회 수사가 되었다.
시마바라와 오무라 감옥에 있는 9명의 신부와 수사들을 니시사카에서 처형하기로 하였다. 1626년 6월 20일 일행은 처형지에 도착했다. 조라 신부, 토르레스 신부, 빠체코 관구장, 조선인 빈센트 가운 수사 등의 순서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며 찬미가를 부르는 순간,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다. 벌겋게 타오르는 맹렬한 불길 속에서 하늘을 향한 순교자들의 얼굴이 기쁨에 차서 찬미가를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신부 수사들은 배교하지 않음을 알고 짧은 시간에 강력한 불로 화형하였다. 유해는 자루에 넣어져 바다에 버려졌다.
빈센트 가운은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에 의해 대마도의 딸 마리아에게 양육되다가 모레혼 신부에게 맡겨졌다. 1603년 모레혼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학공부를 하면서 조선인과 일본인을 위한 전도를 담당하였다. 그의 덕과 학식, 인품을 보아 조선 전도의 임무를 맡기려고 북경에 파견되었다. 파견된 지 4년, 1618년 빈센트는 조국의 엄한 쇄국으로 복음전파의 꿈을 접어두고 일본으로 되돌아왔다. 하느님은 그를 박해자에 대한 진리의 증인으로 간택하였다.
박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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