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자유주의의 선구자”
‘우신예찬’ 통해 성직자 타락 풍자
16세기 유럽 사회·교회 쇄신 촉구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알프스를 넘어 북쪽으로 번져 나간 운동이자 중세를 마감하고 근세가 시작되도록 한 운동, 「휴머니즘」.
에라스무스(Erasmus, Desiderius 1466/1469?~1536)는 16세기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 인물로서 「인문주의」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인문주의의 왕자」로 불린다.
인문주의의 왕자
그는 중세 교회의 권위와 하느님 중심의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원천적인 철학적 물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 존엄성을 확인하고 옹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고전적 의미의 인문주의를 표방했으며 W. 딜타이가 「16세기의 볼테르」라 불렀듯 세계적 정신의 소유자였다. 또 근대 자유주의의 선구자였고 F. 라블레를 비롯한 프랑스 문예 사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알프스 북부의 북방 인문주의는 이탈리아 인문주의에 비해 사회 비판적 종교 개혁적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인문주의」(Christian humanism) 또는 「성서적 인문주의」(Biblical humanism)라 부를 정도다.
그런 맥락에서 흔히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예술과 학문을 낳았고 알프스 북부의 르네상스는 종교와 사회개혁을 낳았다」는 주장을 하곤 하는데 이는 북부 유럽 경우 당시 봉건 제도와 교회의 힘이 강력하게 남아 있어 갈등의 요소가 많았었다는 분석이다.
고전 연구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남아있어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이 세속적인 그리스 로마 정신으로 돌아가기 위한 연구에 몰두한 반면 북방 인문주의자들은 성서와 초기 교회 정신으로 복귀하려는 정신이 강했고 고대 문헌들을 공부하여 얻은 통찰들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많았다.
자연히 성서와 초기 교부들의 원전 연구를 위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배우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초기 교회 시대의 생활과 정신에 비추어 세속화된 현실 사회와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 교회와 성직자의 타락을 풍자한 에라스무스의 대표작 「우신예찬」(Encomium Moriae) 역시 그러한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16세기 유럽 사회와 교회의 모든 제도들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쇄신을 촉구했다.
아우구스티노회 사제
에라스무스는 1469년(1466년 기록도 있음) 로테르담에서 로헤르 헤라르트와 마르가레타 사이의 둘째로 태어났다. 서자 출신이라는 멍에를 평생 지녔던 그의 본래 이름은 헤르트 헤르츠(Geert Geertsz). 에라스무스는 세례명이다.
네덜란드 데벤테르의 성레보인 교회에 들어가 3학년까지 진급한바 있는데 이때 그의 스승 얀 신텐과 교장 알렉산데르 헤기위스 모두 인문주의자였다. 에라스무스는 학생 시절 고전 라틴어 시를 쓸 만큼 총명했다고 알려진다.
부모가 일찍 사망한 후 형과 함께 수도원에 보내졌던 에라스무스는 1480년대 말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 1492년 사제로 서품됐으며 이후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이때 그가 살았던 신학원에는 후에 로욜라의 이냐시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이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에라스무스는 이 시기 고대 문헌에 관심을 가지며 이를 하느님에 관한 가르침과 연결시키는 것이 자신의 과제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1499년 영국으로 건너가 당시 영국 르네상스 지도자들이었던 콜릿(John Colet), 모어(Thomas More), 피셔(John Fisher) 등을 만난 에라스무스는 그중에서도 콜릿을 통해 개혁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성서에 근거해서 새롭게 신학에 접근할 수 있는 결정적 동기를 부여받았다.
당대 지성계를 강타한 역사적 산물이면서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는 그의 저술들은 이성적 인본주의를 표방한 걸작품으로 인정받는 「우신예찬」과 더불어 「자유의지론」 「금언록」 「그리스도교 군인 교본」 등이다.
일반 언어로 성서 번역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처음으로 인쇄된 그리스어 신약성서이다. 그는 이를 일반 언어로 번역, 풍부한 해설을 곁들여 출판했는데 이 작업은 오랫동안 성서의 대명사로 통하던 라틴어 번역 불가타(Vulgata)로 부터 벗어나 성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갖는 첫 관문 역할을 했다.
종교 개혁이 시작될 무렵 유럽에서 가장 명망 있는 사람으로 생애 최고의 시기를 누렸던 에라스무스는 그러나 시대적 상황 안에서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과 교회의 신학자들 안에 놓여있었다.
그 가운데 분열과 전복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세계의 평화와 통일을 목표로 했던 그는 온건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결정적인 교회 쇄신을 위한 해결책을 모색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초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음에도 당시 종교 개혁가들과는 달리 끝까지 가톨릭 신자로 남아 있으면서 교회내 개혁을 추구했고 그리스도교 순수 영성을 사랑하며 수호하고자 노력했던 에라스무스.
은총의 도움 없이 인간은 선(善)을 취할 수 없고 그 안에서 발전할 수도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에게 연구와 노력의 여지를 남겼던 그는 자유를 옹호하는데 있어서 한편으로는 복음과 교부 그리고 스콜라주의자들을, 다른 한편으로는 인문주의의 보편적 유산을 합치시킴으로써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조화를 통한 참된 자유의 세계를 그리는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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