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놀이에 구멍 내 똑똑 피흘리다 죽어
아우구스티노회 수사 하치로
아우구스티노회가 일본포교를 시작한 것은 1602년 히라도에 상륙하면서 였다. 1600년 경 예수회 이외에도 일본포교가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1612년에 나가사키, 오무라에 진출하여 활발한 사목활동을 하고 있던 중에 1614년 선교사 추방을 당하였다.
재 잠입에 성공한 에르난도 산 호세 아야라 신부는 나바렛트 신부와 함께 배교자 오무라 스미요리 영주에 의해 무인도 다카시마에서 참수되었다. 그 후 선교사 구출 작전 실패로 순교한 즈니카 신부 등 많은 회원들이 순교하였다.
1630년 9월 오무라 감옥은 신자들로 초만원이 되어있었다. 나가사키에서 신부 이외의 사람들을 9월 28일 처형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아우구스티노회의 프란치스코 데 예수(F. Jeus) 신부는 그들 중 3인의 전도사에게 수도허원을 허락하였다. 조선인 루이스 하치로에게는 루이스 데 산 미겔 하치로라는 수도명을 주고, 베드로 요우에몽에게는 성체의 베드로, 기지로는 루이스 데 산 아우구스티노라는 수도명을 주었다. 순교하기 전 9월 26일 감옥에서 아우구스티노회의 수도자로서 서원을 하였다.
같은 날 마리아 신부는 23인에게도 제삼회원으로 입회를 허가하였다. 이들과 함께 조선인 하치로 수사는 9월 28일에 순교하였다. 이들 어깨에는 「이들은 장군의 명을 듣지 않고 기리시탄의 신앙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사형에 처한다」라는 띠를 걸고 있었다.
도미니코회 수사 요한네
1587년 도미니코회는 극동선교를 위해 필리핀에 로자리오 관구를 설립하였다. 1602년에 프란치스코 모랄레스 신부를 비롯하여 5명이 사츠마에 상륙하여 나가사키, 교토, 오사카로 선교지를 확대해 갔다.
선교사 추방령으로 국외로 추방되었다가 잠입하는데 성공한 후로 열렬히 헌신적으로 포교활동을 하였다. 신부 수사 57명과 186명의 도미니코회 회원이 순교하였다. 점점 박해가 심해지자 1637년 도미니코회의 선교 활동은 중단되었다.
1630년경에는 기리시탄들을 죽이지 않고 신앙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고문 방법도 여러 가지로 등장하였다. 신자들은 집에서 쫓겨나 산속으로 들어가 풀과 나무껍질 등으로 연명해 갔다. 산중에서 사목을 하고 있던 도미니코회 일본인 티에고 산타 마리아 신부가 1633년 8월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 열심한 전도사 2명을 수도자로 받아들였다.
8월 14일 조선인 요한네 요뵤에는 티에고 산타 마리아 신부 앞에서 도미니코회의 수도자로 서원했다. 그는 산타마리아 신부의 숙주이며 전도사로 일해 오다가 감옥에서 순교를 앞두고 은혜롭게 수도자가 되었다. 또 한 사람은 미겔 기뵤에였다.
1633년 8월 15일 순교의 날 이들은 천천히 찬미가를 부르며 서로 고별의 인사를 나누고 5명의 수도자들은 구멍 속에 거꾸로 매달렸다. 장시간 죽지 않고 고생하도록 관자놀이에 구멍을 내어 피가 똑똑 떨어진지 3일이 지나 모두 숨을 거두었다. 그 외는 화형과 참수로 순교하였다.
박양자 <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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