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추방·일본어기도 강요 등
조선교회 탄압 점점 거세져
일본교회 신사참배 허용이 조선교회도 영향
‘선교 우선정책’으로 민족문제 외면하기도
역사란 과거 기록의 보존인 동시에 미래 세대를 위한 선택의 과정이다. 역사가는 과거 속에서 미래를 보고 그 미래를 위해 현재를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읽고 그것을 인간의 역사에 다시 투영해왔다.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오류마저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긍정적인 힘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회개가 따랐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은 광복 60주년을 맞아 가깝고도 먼 이웃인 일본교회와의 올바른 관계 재정립을 통한 새로운 형제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특별기획을 마련한다.
<1> 한국교회에 드리운 일본의 그림자
일제시대 일본과 조선교회
1549년 8월 15일 예수회 창설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신부가 일본 큐슈지방 가고시마에 도착해 전도를 시작함으로써 비롯된 일본 천주교회의 역사는 한국교회만큼이나 순탄치 않았다. 선교사들의 노력에 힘입어 교세를 확장하며 1580년에는 대목구로 승격되기도 했던 일본교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시대, 혹독한 탄압으로 거의 소멸되다시피 하다 1800년대 개항 이후에야 복음화의 길을 다시 걸어갈 수 있었다.
메이지시대(1868~1912) 말기부터 다이쇼시대(1912∼1926)에 많은 선교사가 들어와 교세가 커지자 교황청은 1919년 일본에 교황사절을 주재시키게 된다. 또한 1927년에는 일본 천주교 사상 처음으로 일본인 주교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호시탐탐 대륙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일제에 의해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진 이후로 일본교회는 「신사 참배」 문제로 어려운 국면에 놓이게 된다. 당시 일본교회는 신사 참배 행위를 십계명 가운데 제1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왔다. 이에 따라 학교에서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신자 학생들로 인해 교회에 대한 중상 비방이 늘어났다. 1934년에는 군부의 압력으로 나가사키교구 관할의 아마미 오오시마에서 교회가 운영하던 오오시마 고등여학교가 폐교되고 성당이 파괴되는가 하면 많은 신자들이 배교서약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받는 등 갈수록 교회에 대한 탄압이 거세졌다.
이렇게 되자 큐수지역 4명의 교구장들은 1935년 3월 합동 교서를 내 당시의 상황을 「미증유의 비상시」라고 전제하면서 『신자는 이런 비상시국에야말로 천황께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호소하기에 이른다. 이어서 4월 25일에는 주일 교황청 사절 바오로 마레라 대주교를 비롯한 12개 교구 대표 전원이 회의를 연 후 연대 서명으로 공동 교서를 발표해 일본정부에 비행기를 헌납키로 하고 신자들의 협력을 부탁하는 등 생존을 위한 일본교회의 몸부림은 점차 적극성을 띠어갔다.
나아가 신사 참배 문제와 관련한 입장을 수차례나 교황청에 문의해 급기야 1936년 5월에는 포교성성으로부터 『국가 신도(神道)의 신사에서 벌어지는 예식은 단순한 애국심의 표현이므로 가톨릭 신자가 거기에 참여해서, 다른 국민들과 같이 행동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지침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이렇게 신사 참배를 허용한 결과 일본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이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특히 포교성성 지침이 학교 등 단체 행사로서의 신사 참배만이 아니라 개인의 신사 참배마저도 애국심의 표현이라고 확대해석해 신자들에게 참배할 것을 권고함으로써 그리스도교적 이성으로 세파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쓰던 일본교회는 이후 「일본천주교 전시활동지침」을 발표하는 등 전쟁 협력을 장려하면서 정신없이 탁류에 휘말려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일본교회의 모습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해 있던 조선의 교회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는 대륙 침략 정책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강력한 「일본화」 정책을 시행했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신사 참배 강요였다. 그러나 1920년대만 하더라도 조선교회 지도자들은 신사 참배에 포함되어 있는 신도 의식적 요소 때문에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조선교회는 1925년 「교리교수 지침서」에서 신사 참배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를 단죄했다. 이 무렵 일제는 공립학교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해 천주교 신자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죄목으로 퇴학 처분 당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교회와 일본 총독부는 신사 참배 문제로 예리하게 대립했다.
그러나 1936년 일본 신자들에게 신사 참배를 해도 괜찮다는 결정을 내린 교황청의 지침이 알려지자 이 결정은 식민지 조선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기에 이른다. 주일 교황사절 마레라 대주교는 조선교회 신자들에게 「국체명징(國體明懲)에 관한 감상」이란 글을 통해 교황청 훈령의 정신을 따라 적극적으로 신사에 참배할 것을 권고했던 것이다. 서양 선교사들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던 조선교회 주교들은 이를 계기로 신사 참배를 반대하던 종전의 태도를 철회하고 용인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 신자들에게 신사 참배는 신앙의 문제인 동시에 민족 감정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상당수의 조선인 신자들은 교회의 이런 결정에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 끝까지 참배를 거부했다. 신사 참배를 하지 않기 위해 근무하던 학교나 병원을 사임하는 수녀들이 잇따라 나타났으며, 학교와 성당이 폐쇄되는 고초를 무릅쓰고 신사 참배를 완강히 거부해 구속되는 성직자도 있었다. 당시 평양지목구장이던 모리스(Morris, M.M.) 신부도 참배에 반대한 결과 자신의 선교지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이후 전시 체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조선교회는 신사 참배에 대한 조선인들의 민족적 감정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단순히 종교적 측면에서만 제한해 생각함으로써 신사 참배에 대한 천주교회의 저항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일본 제국주의가 드리운 그림자
1910년 한일합방 이후 1919년 3.1운동에 이르기까지 신자수의 연평균 증가율은 2.1%로 개화기의 증가율 6.98%에 비해 현격하게 둔화되었다. 이후로도 이같은 현실은 지속돼 일제 말기인 1941~45년 사이에는 404명이 증가하는데 그치는 등 민족으로부터 외면당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현실은 종교 활동에 대한 일제의 규제 탓도 컸지만, 민족보다 선교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선교 우선주의」 정책으로 민족문제를 외면했던 교회 지도자들의 태도로 조선 민중들이 교회에서 희망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조선교회에는 더욱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일제는 미국인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아일랜드인 성직자들을 연금시키는가 하면 1942년에는 대구교구장 무세 주교를 사임시키고 일본인 성직자가 교구장이 되도록 압력을 가하는 등 교구장마저도 일본인 성직자로 바꾸려 했다.
일제 막바지에 이르러 총독부는 조선교회에 여러가지 탄압을 가해왔다. 가사가 불온하다 하여 몇몇 성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교회에 대해 반전사상을 선전한다는 혐의를 씌워 신자들을 구속하기까지 했다. 또 성당에서 바치는 공식 기도마저 일본어로 하도록 강요하고, 교회 출판물도 일본어로 간행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황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도를 강요하고, 교회 내에 「국민정신총연맹」 지부를 결성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한.일 양 교회는 절연된 형제관계를 강요받으며 광복을 맞았던 것이다.
■“역사에 대한 성찰·반성은 양쪽에서 함께 이뤄져야”
광주가톨릭대 신학연구소장 이덕근 신부
『그 어느 때보다도 한·일 두 나라 교회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마음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교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연구소장 이덕근 신부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천주교 성직자이면서 일본에서 무려 8년간이나 「신도 신앙」을 공부했다. 그것도 일본 보수 우익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국학원대학 대학원에서 신도학 전공으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도 신앙이라면 일제 청산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신사 참배와 직결되는 문제다. 그런 그가 한.일 양 교회의 친교가 더욱 깊어지고 이를 통해 하느님의 역사에 더욱 잘 부합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이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연구자들조차도 신도 신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빚어지는 오해와 잘못된 역사 또한 적지 않습니다』
이신부는 한일 양국 관계에 있어 오랫동안 풀지 못한 채 이어져오고 있는 답답한 역사의 이면에도 이해의 부족이 깔려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신도 신앙을 「신사 신도 신앙」과 「국가 신도 신앙」으로 구분해 접근할 것을 요청한다.
『일본 사회에서 신도는 마치 우리의 전통 민간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역사 청산에 있어 문제가 되고 있는 국가 신도는 메이지 정부가 국가통합을 위해 천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신도 신앙을 이용하기 위해 창설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문제를 낳고 있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신사 참배 문제와 관련해 이신부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파견된 선교사들이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잘못된 선택을 한 결과 한.일 두 교회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고 『역사를 기억하려는 이유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데 있다』고 말했다.
신도에 대한 이해 부족이 지금도 일본에서 사목하는 선교사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는 현실을 많이 목격했다는 이신부는 『마음을 열지 못해 60년이라는 긴 시간을 안타깝게 흘러 보낸 면도 없지 않다』고 털어놓는다.
『신앙 안에서 한.일 두 나라 교회는 형제』라고 밝히는 그는 『화해를 통해 새로운 장을 열어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각도의 접근이 필요하다』며 『성찰과 반성은 양쪽에서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본 우익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헌법 구조 변경을 위한 도화선을 만들기 위한 속셈이라고 역설하는 이신부는 이러한 문제에 한일 양 교회 신자들이 올바른 시각을 지니기 위해서도 역사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며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성소를 나누려는 자세가 없다면 또 다시 권력에 휘둘려 주님의 부르심에 귀를 막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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