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철학의 독창적 사유 제시
언어를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철학문제 해결의 지름길임을 강조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는 침묵하라』
「현대 영미 철학 최고 슈퍼스타」라 불리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는 루드비히 비트켄슈타인(1889~1951)은 어느 날 자신의 철학을 쉽게 풀어달라는 친구에게 이같은 대답을 남긴다.
1999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뽑은 20세기 최고 인물 가운데 하나로 호명된바 있는 비트켄슈타인. 그는 「철학과 언어 사이의 연관성」 이라는 현대 철학의 새로운 담론을 만들었고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라는 성과 외에도 세속의 소유와 지위를 모두 거부하고 구도자 같은 삶을 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1889년 4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다계 철강 재벌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그는 13살까지 가정교사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며 공학적 재능을 보여 재봉틀 모형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한 모습은 루드비히를 자연스럽게 린쯔의 한 기술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했다.
이후 베를린의 샬로텐부르즈 기술전문대학에 진학해 2년 과정을 마친 그는 영국 맨체스터 대학으로 가서 항공 공학을 전공하기로 했는데 여기에는 공학에 집착을 보였던 아버지의 기대에 대한 의무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풀이가 많다.
1908년 만 19세의 나이로 영국으로 유학을 간 루드비히는 공학을 공부하면서 수학적 문제들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됐고 특히 친구들의 권유로 러셀의 「수학의 원리들」(The Principles of Mathematics)을 접하고는 수리 철학적 문제로 주된 관심사를 전환하게 된다.
러셀을 찾아 캠브리지 대학을 방문한 루드비히는 그와의 만남, 그리고 러셀로부터 철학적 사고에 대한 재능을 확인 받은 후 비행기에 대한 계획을 완전히 접고 캠브리지에 입학, 본격적인 철학 공부에 돌입한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군대에 자원 입대해서 1916년에는 러시아 전선에서 떨친 용맹으로 훈장을 받기도 했는데 그 후 장교 훈련을 받다가 전쟁 막바지에 이탈리아 군의 포로가 되어 약 10개월간 포로 생활을 했다. 포로생활을 포함한 5년여의 참전 기간 동안 루드비히는 후에 「논리-철학논고」로 알려지게 될 책의 원고를 완성한다.
1919년 포로에서 석방된 후 고향에 돌아온 루드비히는 전쟁 전과 사뭇 다른 사람으로 변모된다.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람으로 변했는데 톨스토이의 「복음서」에 감동해서 늘 책을 지니고 다녔고 종교적 테마가 스며있는 「죄와 벌」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을 탐독했다.
또 철학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물려준 막대한 재산을 누이들과 형에게 모두 나눠 주었는데 재산 양도를 위한 절차를 밟으면서 자신에게 남겨진 재산이 단 한푼도 없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 번 확인했다고 알려진다.
철학 공부를 포기하고 약 5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루드비히는 수사가 될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수도원 정원사로 일하게 됐다. 그리고는 이어서 누이 그레틀이 추진하고 있던 저택 건축 작업에도 관여했다.
그가 30대를 교사와 정원사 건축가로 보내고 있을 때 캠브리지에서 루드비히 비트켄슈타인은 이미 전설적 인물이 돼 있었다. 1920년대 초 새로운 논리학과 과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비엔나 써클」에서는 그의 「논리 철학 논고」가 마치 성서처럼 읽혀지고 논의될 정도 였다.
1929년 캠브리지로 돌아온 루드비히는 1939년 철학 교수직을 승계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다시 자원,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펴기도 했다.
1944년 다시 캠브리지로 돌아와 교수직을 맡았지만 『교수라는 허무맹랑한 자리가 생매장 된 존재처럼 느껴진다』면서 1947년 말 그만둔 후 아일랜드 서부 해안가 한 오두막에 칩거하며 저술에만 몰두했다. 이후 전립선암에 걸렸으면서도 치료를 거부하고 집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그는 『멋진 삶을 살았다고 사람들에게 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1951년 4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중심적 주장은 철학적 문제가 우리들이 평소 사용하고 있는 언어 작용의 오해로부터 생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드비히가 추구한 것은 「언어 역할에 대한 올바른 이해」였다.
전문가들은 루드비히가 언어를 철학적 관심의 전면에 내세운 것은 「언어가 인간 정신의 구체적 객관적 표현이라는 통찰로부터 시작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오랫동안 철학의 탐구 대상이었던 「이성」의 위치를 「언어」로 대치시키는 효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성 의식 정신 등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현장인 「언어에 대한 비판」을 철학의 첫 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또한 언어를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철학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고 보았다는 면에서 이전 철학자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종교에 대해서는 「그림을 사용하는 것」으로 비유해서 설명했고 「문법으로서의 신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또 「신앙이란 이해의 문제도 확신의 문제도 아니며」 그것은 인간의 「삶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움직일 수 없는 신앙」이며 「삶 전체를 규제할 수 있는 살아있는 힘」이라고 밝혔다.
청년기까지 갑부 집안에서 남부럽지 않은 부를 향유했으나 30대 이후에는 스스로를 가난의 지경으로 몰아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루드비히 비트켄슈타인. 「평범하거나 순탄한 삶」으로 비춰지기는 다소 무리 일 수 있지만 세인들 기억 속에는 「분석 철학의 거장」 「논리학과 언어 철학에 관해 독창적이고 중요한 철학적 사유 체계를 제시한 인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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