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로마 유학생 고문에 못이겨 배교
「인간이 이렇게도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도 파아랗습니다」
가쿠레 기리시탄 마을 시츠(出津)는 일본의 문학 소설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가 「침묵」을 탄생시킨 마을이기도 하다. 작가는 침묵의 무대가 된 이 마을에서 창창히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 심정을 위의 글로 토로하였다. 일본 기리시탄 박해사에는 당당히 순교하는 자도 있고, 비굴하게 배교하는 자도 있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 두 가지의 극한 상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인간의 약점과 인간의 나약성 가운데서도 그것을 초월하는 은혜 속에서 순교하는 자를 찬송해 왔다. 이 장에서는 배교자의 슬픔과 연민, 죽지 못하여 살아있는 자가 되어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인간의 또 한 면을 보게 된다.
토마스 아라키(荒木)는 일본인 최초의 로마 유학생으로 1612년에 사제품을 받고 1615년 귀국, 1619년 8월에 체포되었다. 신앙을 버리라는 말에 처음 한번은 머리를 흔들었다. 고문이 가해지자 배교하였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배교 신부 베드로』라는 별명이 붙었다.
배교 후, 토마스 아라키에게 기리시탄을 배교시키는 일이 주어졌다. 잠입해 들어온 선교사 3인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 통역관으로 동석하였다. 배교를 강조하고 있는 아라키에게 오자라자 신부는 다만 한마디 이렇게 말하였다. 『너의 라틴어는 선하나 너의 신앙은 악하고 너의 유학은 헛일이었다.』
일본인으로서 최초의 유럽 유학생이고 기리시탄 시대 최고의 지식인이며 문화인 토마스 아라키(荒木)는 후에 마음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여 순교하였다는 설도 있지만 불확실하다. 가톨릭 측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일본인 배교자. 유럽에 유학하여 각지에서 환영받아. 때문에 마음이 교만하였다.」
베드로 가스이 기베(岐部) 신부는 1614년 마카오로 추방되어 그곳 대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마카오의 장상들은 일본인 신학생들이 신부 되는 것을 거부했다. 1618년 기베는 신부 되는 길을 찾아 로마에 가서 서품되었다. 32세였다.
로마를 떠나 16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잠복활동을 하고 있던 중, 1639년 미즈자와(水澤) 근처에서 체포되었다. 기베 신부와 4인의 신부가 에도에서 심문을 받을 때 배교자 훼레이라 신부가 동석하여 이들에게 배교하도록 설득하고, 기베 신부는 배교자에게 회심하도록 권하였다.
거꾸로 구멍에 세워지는 고문이 가해졌다. 의식이 몽롱해 지자 형리는 『염불을 외라』고 큰소리를 치자 동료 두 신부는 반사적으로 염불을 외웠다. 두 신부는 즉시 배교한 것으로 선언되었다. 절대로 배교하지 않았다고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기베 신부는 염불은커녕 옆의 동료를 격려하고 있었다. 화가 난 형리는 신부를 구멍에서 올려 목을 쳤다. 때는 1639년 7월 4일 향년 52세였다.
기베 신부도 역시 아라키 신부와 같이 유럽 유학생으로 세계적 지식과 문화의 체험자였지만 두 신부의 마지막 모습은 정 반대였다.
박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