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피해지서 피어난 ‘화해의 꽃’
나가사키 평화기원제
올해로 23번째… 4000여명 참석
박정일 주교 등 한국 신자도 동참
광복. 한민족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민족들에게 새로운 빛을 안겨준 60년의 역사는 일본과 일본교회에 어떤 의미로 새겨져 왔을까.
일본 나가사키대교구(교구장=다카미 미즈야키 대주교)가 8월 9일 오후 8시 원자폭탄이 떨어진 폭심지 일대에 조성된 평화공원(헤이와 코엔)에서 개최한 평화기원제는 일본교회가 나아가고 있는 길을 가늠할 수 있게 한 행사였다.
올해로 23번째를 맞은 평화기원제가 열린 평화공원은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일본 전역에서 몰려든 4000여 신자와 평화를 기원하는 시민들이 내뿜는 열기가 더해져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날 행사에는 화해와 평화를 향한 대열에 함께 하려는 20여명의 한국 신자들이 동참해 일본교회를 향한 따뜻한 우정을 보여주었다.
전 마산교구장 박정일 주교를 비롯해 서울대교구 김종국 신부, 대전교구 민병섭 신부(논산 대건 중·고등학교 교장) 등 한국 사제 10명이 일본교회 사제 70여명과 공동 집전한 이날 미사는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평화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장이 됐다.
나가사키대교구장 다카미 미즈야키 대주교는 이날 미사에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도 평화를 지키려는 노력으로 다른 생각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용서와 화해의 장을 만들고 있다』며 『우리들은 단순히 평화의 기원자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따라 평화를 실현해나가는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말했다.
전쟁의 아픔을 밑거름으로 평화의 길을 걷고자 함께 손을 모은 한일 두 교회 신자들의 모습은 전쟁의 공포에 휩싸여 있는 전 세계를 향해 두 나라가 함께 지고 가야 할 평화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는 듯했다.
평화염원 횃불 행진
◎… 미사에 앞서 한국과 일본 신자들은 나가사키대교구청 앞 광장에 모여 평화를 염원하는 횃불을 밝혀 들고 평화공원까지 행진하며 묵주기도를 바쳤다. 원폭으로 폐허가 된 시가지를 복구하면서 원폭투하 중심지 언덕에 세워진 평화공원. 신자들은 원폭 희생자들을 기리는 제단에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바치며 나가사키가 「평화의 진원지」로 자리잡아 나가길 기원했다.
행사를 지켜본 박정일 주교는 『일본교회의 성인 가운데 일본 신자들과 같은 믿음으로 순교한 한국인이 있다는 사실은 한 믿음을 가지면 한 형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밝히고 『양 교회의 신자들이 두 나라가 가까워질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핵화 선언문 발표
◎… 같은 날 나가사키시도 평화선언문을 발표해 핵 보유국 지도자들에게 핵무기 폐기와 평화를 위한 협력을 촉구했다.
나가사키시 이토 잇쵸우 시장은 선언문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지한 태도로 과거의 역사를 배우며 평화의 소중함과 생명의 존엄함에 대해 생각해 달라』고 요청하고 『핵무기 폐기와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 결코 포기치 않고 노력할 것』을 선언했다.
특히 그는 『우리는 자국이 일으킨 전쟁을 깊이 반성하고 정부로 인해 또 다시 전쟁의 참화가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굳은 결의 하에 헌법을 제정했다』며 『헌법의 평화이념을 준수하여 피폭국으로 핵무기를 「불보유, 불개발, 불반입」하겠다는 비핵삼원칙을 곧바로 법제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평화공원에서 만난 나카야마 사츠키(마리아.37.나가사키 시로야마본당)씨는 『전후 세대 대부분이 이웃 한국이나 한국교회의 역사는 물론이고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밝히고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자주 만나고 교류할 필요성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 부인 양정례(아가다.59)씨를 비롯해 딸 박혜정(로사.33)씨, 외손녀 김진희(모니카.8)양 등 일가족 3명을 이끌고 평화기원제에 참가한 박선규(베르나르도.64.부천 중2동본당)씨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기울여 왔는지 되돌아보게 됐다』며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신자들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여갈 때 새로운 교회의 역사를 써내려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나가사키대교구 다카미 미즈야키 대주교 인터뷰
“한·일 상호이해 위해 교류·만남 지속돼야”
“한국 등 아시아 나라에 고통드린 점 깊이 사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 고통을 드린 점에 사죄드리고 싶은 마음은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음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나가사키를 평화와 화해의 진원지로 가꿔 나가고 있는 나가사키대교구 다카미 미즈야키 대주교의 첫 마디는 가슴 한켠으로 늘 아쉬움을 품고 일본교회를 대해오던 한국 신자들에게 큰 떨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다카미 대주교의 사과가 가슴에 다가온 것은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한국과 한국교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담겨져 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정치적 문제로 상호간에 괴리와 과거 역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큰 게 현실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미래지향적인 방향을 찾기 힘들다고 봅니다』
한·일 두 나라가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양 교회 신자들의 몫이 크다는 게 다카미 대주교의 생각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복음을 믿는, 특히 같은 길을 걸어가는 형제로서 두 나라 신자들이 인식차를 좁혀 나가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자신 또한 학창시절에 일본의 근대사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고 고백한 다카미 대주교는 올바른 역사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역사교과서 문제와 관련해 한·중·일 3국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역사교과서를 통해 과거에 대한 반성과 피해 당사자들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사용되길 바란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입으로만 평화를 외치는 게 아니라 전쟁의 문제점 등을 후세에 잘 가르쳐야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카미 대주교는 나아가 한국교회 차원에서 일본과 일본교회에 대한 교육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해 묻는 등 한·일 양 교회의 교류와 역사 인식 문제에 깊은 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울러 근래 들어 교구간 자매결연을 비롯해 소공동체 교육 등을 통해 활발해지고 있는 두 나라 교회간의 교류상을 언급하며 고무적이라고 평가한 그는 나가사키대교구도 보다 적극적인 몫을 찾아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교회의 노령화를 비롯해 공동화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본교회의 현재를 솔직히 밝힌 다카미 대주교는 이런 현실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도 한국교회와의 교류와 협력이 절실하다고 역설했다.
『상호 이해를 위한 전제는 교류와 만남입니다. 이번 행사가 두 나라 교회가 더욱 가까워지고 협력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진설명
▶한·일 양국의 사제단이 평화공원에서 봉헌된 평화기원미사를 공동 집전하고 있다.
▶일본 신자 어린이들이 평화기원 미사에서 두 손을 꼬옥 모은 채 기도하고 있다.
▶한·일 두 교회 사제단을 선두로 행사 참가자들이 평화를 기원하는 횃불을 들고 평화공원까지 행진하고 있다.
▶평화기원제에 참가한 한국교회 신자들이 기도를 바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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