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사이드」, 2002년 월드컵 이전까지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축구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무튼 이 규칙은, 수비가 없는 공간에 먼저 공이 들어가면 이를 무효화시킨다는 것인데, 월드컵 때 그것 때문에 땅을 치게 억울한 적도 있었지만, 또한 그것 때문에 안도의 숨을 몰아쉰 적도 여러 번 있었음을 모두는 기억할 것이다. 경기를 보면서, 그런 규칙을 오프사이드라고 한다면, 인생에도 오프사이드가 분명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 때문에 죽고 싶을 만큼 억울하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지만, 사실은 그 울분과 고통이 나를 새롭게 세워주고 다시 살리기도 하는, 그런 유리하면서도 불리한 중립 지대가 인생에는 반드시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니엘서 3장의 세 청년이 처했던 죽음과 불의 고통은,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우리 누구나가 경험하게 되는 삶의 「오프사이드」였다. 그 고통이 너무도 커서 사람을 죽기보다 힘들게 하지만, 동시에 이를 통해 자신의 본질을 되찾고, 인생의 질과 품위가 전격 향상되는, 소중하고도 멋진 재생의 기회가 바로 그런 지점일 수 있는 것이다. 이미 3장의 소개는 끝났지만, 함께 묵상할 수 있는 소재가 많은 부분이라서 이번 주에는 그것들을 중심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고발
3, 8~12에서는 바빌론의 신상에 절하지 않는 세 명의 유다 청년이 고발되는 장면이 소개된다. 흥미로운 것은 8절에 등장하는 「고발하다」(카라츠) 라는 아람어 동사인데, 이를 직역하면 그들의 「살점들을 먹다」, 혹은 그들을 「갈기갈기 찢다」라는 의미이다. 타인에 대한 고발과 단죄는 그를 찢고 살점을 파내어 먹는(?) 엽기적 행각과 다를 바 없음을 부각시킨, 강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다니엘서에서 이 고발은, 바빌론 왕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바빌론 관리들에 의해 주동되었다. 즉 이들의 고발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고발이 아니라, 유다 청년들에 대한 질시와 질투 때문에 등장한 비극이었던 것이다. 질투는 타인을 잔인하게 죽게 하고, 이 성서 본문의 마지막이 제시하는 것처럼, 그 사건을 초래한 당사자에게도 똑같은, 아니 그 이상의 고통과 죽음을 되돌아오고야 만다. 공평한 덫인 셈이다.
기적을 낳게 한 믿음
분노한 왕은 곧바로 그들을 체포하고 법정에 세운 후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유다 청년들은, 설령 그들의 하느님께서 지금 당장 구하러 오지 않으신다 해도 이방신에게는 절대로 절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는데(17~18절),
이는 그들의 철통같던 믿음을 보여주는 태도였다. 결국 이 표현은 우리에게 「믿음이 기적을 통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믿음이 기적을 낳게 하는 것」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해준다. 어쩌면 느부갓네살은 이렇게 확고했던 유다 청년들의 신앙과 신념 앞에 이미 패자로서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
고통 속에 함께 계신 하느님
제2경전 부분인 91절에서 왕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져진 세 명」이 어느새 모두 결박을 풀고, 유유자적하며 걷고 있다는 것(91절)과 집어넣은 사람은 세 명이었는데 모두 네 명이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다(92절). 그 네 번째 존재를 느부갓네살은 『신의 아들 같다』(92절)고 표현하는데, 히브리식 사고로 본다면 「신의 모습을 닮은 이」라는 표현은 곧 천상적 존재를 의미하며, 이러한 존재들은 구약성서 전반에서 하느님과 동일한 존재로 암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시험과 불이라는 현재적 고통 속에서도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전면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즉 모든 고난의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만 있다면, 뜨거운 불길 속에서도, 그리고 움직일 수 없이 결박된 상태에서도 「풀릴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시험
당시 근동지역의 화덕은 문이 달려있어 태울 재료들을 집어넣고 태워진 재를 빼내게 되어있었다고 한다. 하느님의 시험은 이처럼 「입구」와 「출구」가 동시에 존재한다. 들어갈 때가 있으면 반드시 나올 때가 있는 것이다. 유다 청년들이 흔쾌히 바빌론측의 고발을 받아들인 것은 이미 이 「출구」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니엘서의 저자는 이러한 그들의 「영리함」을 하느님의 「지혜」로 소개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발견한 출구는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그것을 통해 발휘되는 진실의 힘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기적 때문에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강한 믿음이 기적을 낳게 한다.
이 비결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시련에서도 의연할 수 있고, 그 누구도 하느님으로 무장된 그를 건드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미 그는 신의 모습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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