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양심의 소리’로 말씀”
“하느님 몰라도 양심 따르면 사람은 영생에 이를 수 있어”
혹자는 지난 세기 가장 유명한 가톨릭 신학자로 일컫는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에 대해 『난해한 신학자, 동시에 소박한 사목자』로 부른다. 특유의 문체와 심오한 사상으로 인해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신학자이면서도, 한번쯤 그를 만나본 사람은 과연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 하고 의아해할 만큼, 그는 난해한 신학자이면서도 소박한 사목자의 면모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칼 라너의 신학은 구체적인 인간에서부터, 인간의 동요와 질문, 그리고 인간의 여러 체험으로부터 출발한다. 그에게 신학은 학문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신앙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는 일상의 신비에서부터 신을 체험하고, 일상의 신비로부터 신학을 한다.
라너의 이러한 신체험은 성서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마태오 복음 25장 31절 이하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마련해둔 나라를 상속으로 받아라. 사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내게 마시게 해주었다.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나를 맞아들였고 헐벗었을 때에 내게 입혀주었다』
의인들은 이에 반문한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시게 해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해드렸습니까?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맞아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혀드렸습니까?』
그러면 임금은 말한다.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준 것이다』
라너는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평범한 순간이 가장 신적인 순간이라고 파악한다. 그에 의하면 절대 타자로서의 하느님은 일상과 인간을 떠나서는 체험될 수 없다. 구체적인 인간 상황 속에서 하느님은 체험된다.
이러한 라너의 신 체험은 곧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저 유명한 명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즉 하느님은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서 양심의 소리로 말씀하신다. 자기 양심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굳이 자기가 유다-그리스도교 계시의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느님께 받아들여진 사람이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인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은총과 성의, 하느님과의 일치와 결합, 영생에 도달할 가능성이란 오로지 한 인간의 나쁜 양심에 그 한계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지닌 의미인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하나는 그것이 다른 신앙인들의 의지를 거슬러 그들을 그리스도인화하려는 그리스도교의 오만과 음모가 숨어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복음 선포와 선교 사명을 근원적으로 상대화한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첫 번째 비판은 이 명제가 비신앙인의 구원을 그리스도교가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절대 필요성에 대한 교회의 자기 이해를 표현한 것임을 간과한 것이며, 두 번째 비판은 이미 주어진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의 관계를 시공 안에서 실현시키고 사회적 표현으로 나타내려한 라너의 견해를 보지 못한 것이다.
이미 이러한 사고는 트리엔트 공의회 당시에도 있었던 사고이다. 나아가 암브로시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톨릭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이다. 라너의 이런 사고는 마침내 무신론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과도 대화를 가능하게 했다.
많은 이들은 라너를 아우구스티노,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열에서 평가받게 될 것이라고 과감하게 말한다. 그가 남긴 학문적 업적에 대한 평가의 방향은 논란이 있겠으나, 결코 그가 차지할 위치에 대해서는 왈가왈부가 없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엄청난 저서와 강연으로 학문으로써의 신학, 교회 일치, 현대에서의 교회상을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라너는 로마 국제 신학위원회, 독일 주교협의회 신앙위원회와 독일 교구 시노드의 위원이었으며 세계 각국에서 받은 명예 박사 학위가 15개에 이른다.
또한 사후에도 끊임없이 그에 관한 책과 그의 글들이 출판되고 있음을 보아도 그가 현대 신학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는 1904년 3월 5일 프라이부르크에서 독실한 가톨릭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교수인 아버지와 사업가 출신 집안의 어머니 밑에서 유복한 생활을 한 그는 형을 따라 예수회에 입회했고, 1932년 사제로 서품됐다. 1936년 인스브루크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강의를 시작했다. 1948년부터 인스브루크에서 교의신학과 교의사를 강의하고 수많은 저서들을 집필했다.
교황 요한 23세로부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문위원으로 임명됐으나 후에 사임했다. 하지만 그가 공의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며, 특히 빈 교구장 쾨니히 추기경의 신학 자문위원으로 있으면서 현대인들, 무신론자와 비그리스도인, 비가톨릭인들과 함께 고민하는 공의회가 될 것을 촉구했다. 이러한 그의 구상은 공의회 정신에 반영됐고, 이러한 정신에 따라 교회는, 세계는 물론 타종교와 타교파간의 대화도 가능했다.
라너는 1964년, 로마노 과르디니의 뒤를 이어 뮌헨 대학에서 강의했고, 1967년 뮌스터로 옮긴 뒤, 1971년에 그곳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뮌헨에 거주하면서 예수회 신학교에서 명예교수로 봉직했고, 그후 1984년 3월 30일 인스브루크에서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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