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가득 먹인 후 배 밟자 핏물 나와
3) 루비노 제1단의 순교- 조선인 토마스
훼레이라의 배교가 유럽에 알려지자, 예수회 회원들은 자신의 피로써 그의 죄를 보상하기 위하여 다투어 일본에 파견되도록 지원하였다.
1642년 8월, 루비노 신부를 단장으로 하는 통칭 루비노 제1단 10명이 규슈 사츠마에 상륙하였다. 이들 중 조선인 토마스가 있었다. 즉시 발각되어 나가사키에 연행되었다. 투옥된 다음 날 심문을 받을 때 통역을 맡은 사람이 배교자 훼레이라 였다. 루비노 신부는 훼레이라에게 회심하도록 권하였다. 훼레이라는 곧 일어나 나갔다. 신앙을 배신하여 같은 동료로부터 충고를 받고 돌아서는 당시 62세가 된 훼레이라의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하겠는가.
이들은 7개월 동안 105회의 물고문을 받았다. 입으로 물을 가득 부어넣은 다음, 형리들이 발로 배를 밟으면 입과 코 귀로부터 핏물이 나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 되었다. 벌겋게 다룬 인두로 몸을 태우기도 하였다.
1643년 3월 17일 최후의 날, 니시사카 형장에서 오물을 잔뜩 집어넣은 구멍 속에 거꾸로 내려졌다. 5일째 되던 3월 21일, 조선인 토마스가 하느님께 불림을 받았다. 다음날 루비노 신부, 메틴스키 신부 등도 매달린 채 죽었다. 이튿 날 살아있던 일본인 마르케스 신부는 참수를 당했다.
이들의 유체는 무사들의 칼 시험으로 토막토막 잘려졌다. 유골은 태워져 바다에 버려졌다. 이리하여 루비노 제1단은 모두 순교하여 훼레이라의 배교를 대속하였다.
4) 루비노 제2단의 배교
1643년 6월 27일, 쥬셋뻬 키아라 신부 외 9명, 통칭 루비노 제2단이 또 상륙하였다. 목적은 역시 훼레이라를 회심하도록 하고 자기들의 피로써 그의 죄를 보속하기 위함이었다. 이들도 즉시 체포되었다. 통역관은 배교자 훼레이라였다.
일본의 기록에 「10인, 나가사키로부터 호송되어 여러 가지 심문과 고문 결과, 4인의 신부 배교, 증명서를 썼다. 수사와 동숙은 신부보다 먼저 한 사람 두 사람 씩 모두 배교하였다」고 적혀있다.
이리하여 루비노 제2단은 모두 배교한 것이다. 훼레이라에게 했듯이 이들에게도 사형수의 이름과 처자를 강제적으로 붙여주었다. 키아라 신부에게도 무사였던 사형수의 이름 오카모토 산우에몬(岡本三右衛門)과 처자와 칼 등을 주었다. 1674년의 기리시탄 수용소의 기록에는 「1674년 6월 14일부터 배야소의 글을 오카모토 산우에몬에게 쓰도록 하고 두 사람의 참고인이 입회하기로 되었다」고 적혀있다. 키아라 신부는 84세로 기리시탄 수용소에서 생을 마쳤다.
「기리시탄 수용소에 있는 신부 岡本三右衛門, 남만 시시리 출생, 수용소 생활 40년, 7월 초부터 먹지 않고 앓고 있더니 점점 기운이 떨어져 어제 25일 오후에 생을 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신은 화장하여 불교계명으로 묘비를 하였다.
박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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