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를 향한 일본 교회의 발걸음
양국 수교 후 사회복지 지원·수도자 파견 등
형제적 연대·교류 ‘활발’
일본 주교단 이름으로 수차례 전쟁책임 인정·과거역사 성찰
『자신의 역사를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현재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 전쟁에서 지은 죄라든가 부정을 공평하게 판단하려면 역사의 진실에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 사죄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보상의 행위는 때로는 말보다 중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을 맞아 지난 1995년 일본을 찾은 폰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이 「역사로부터 배운다-새 50년을 향해서」라는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같은 패전국으로서 자신들에 비해 사죄에 인색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본을 향해 던진 화두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며 「국가수준에서 사용하는 역사교과서는 그 나라 국민들의 평균적인 역사의식을 담고 있다」고 한다. 서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한·일 두 나라 관계에 있어 가톨릭교회는 미약하지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꾸준히 해왔다. 이 도정에서 보여준 한·일 두 교회의 모색과 노력은 각각 광복과 패전으로 기록된 민족의 역사를 하느님 나라를 향한 교회 역사의 한 부분으로 승화시켜온 과정이었다.
일제 치하 식민지에 대한 약탈 기제로 작용했던 일본 종교기관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빨리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일조하고 나선 것 또한 일본 가톨릭교회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흐름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 역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나고 한일 양국이 수교한 1965년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처음 한·일 교회 교류에 물꼬를 튼 것은 두 나라 신학생들이었다. 1969년 3월 15일 상호교류를 위해 한국을 찾은 일본 상지대학 신학부 신학생 3명은 대구대교구 방문을 시작으로 수도원 방문, 가톨릭대학교 신학생들과의 간담회, 신자가정 민박 등을 통해 두 나라 교회간의 교류를 향한 문호를 열었다.
이후 화해와 일치를 향한 한·일 두 교회의 모색이 주로 사회복지와 사회정의 등 사회사목 영역을 중심으로 이뤄진 것은 교회의 「현대화(aggiornamento)」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바티칸공의회의 영향이 컸음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 당시 도쿄대교구장 시라야나기 세이치(白柳誠一) 대주교가 광복 후 일본인 주교로는 처음으로 1972년 4월 20일부터 6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일은 한·일 교회 교류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일대 전환점이었다.
한센병환자 자활시설인 성 라자로마을 내에 도쿄대교구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6개 본당 신자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지어진 중증장애인 숙소인 「반석의 집」 축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시라야나기 대주교의 한국교회에 대한 이해는 한·일 두 교회 신자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를 계기로 궤도에 오른 일본 신자들의 일치를 향한 걸음은 한국과 한국교회사에도 여기저기 족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시라야나기 대주교의 방문에 이어 그해 6월에는 일본 카리타스 후원으로 일본의 한센병환자 치료 권위자가 성 라자로마을에서 1개월간 한센병환자 실태조사와 치료 활동을 펼치는가 하면, 74년 3월에는 일본가톨릭중앙협의회 사무국장 겸 일본 사회복지협의회 회장인 마스무라 신부가 라자로마을을 방문해 일본 전 교회 차원의 지원 방안을 모색하는 등 사회복지를 중심으로 두 교회 차원의 교류가 활발해진다.
이 시기 일본교회는 한국과 같이 일제의 피해를 겪은 베트남의 전후 복구사업을 돕기 위해 나서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1973년부터 신자청소년들이 중심이 된 홋카이도(北海道) 소년·소녀스카우트 대원들이 매년 정기적으로 한국을 방문해 한국가톨릭스카우트 대원들과의 만남과 역사 교류 등을 통해 두 민족의 화해를 위한 보폭을 확대해오고 있다.
특히 한·일 두 교회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대사회 활동 영역에서 다시 한번 빛과 소금으로서의 몫을 재확인하면서 형제적 연대의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맞는다.
1974년 7월 23일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당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유신헌법 무효」를 주장하는 양심선언을 발표한 후 구속되자 일본가톨릭 정의와평화협의회는 성명을 발표해 한국 신자들과의 연대를 표명하는가 하면 전국적인 기도회를 열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본 신자들의 뜻을 모으기도 했다.
또 도쿄대교구 시라야나기 대주교도 교구 신자들과 24시간 철야기도를 바치며 지주교의 석방을 촉구하는 등 일본교회는 민주화에 앞장서고 있던 한국교회에 힘이 되어주었다.
나아가 일본교회는 광주민주화운동 등 사회적으로 중요한 시기마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한국 소식을 일본 사회와 종교계에 전해 일본 신자들과 양심적인 세력들의 힘을 모아 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본교회의 모색은 인적 교류를 통해 더욱 다양해지고 풍요로운 만남으로 이어졌다.
일제시대부터 일본교회에 활동하고 있던 작은형제회 소속 수사들을 조선에 파견한 것을 필두로 1970년대 이후에는 본격적인 수도자 파견 등을 통해 화해와 일치를 향한 행보에 힘을 더했다.
이런 모색이 바탕이 돼 2004년 현재 한국에는 성모의 기사 수녀회를 비롯해 성 프란치스코 의료봉사 수녀회,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등 15개의 수녀회와 예수의 작은 형제회 등 2개의 수도회가 진출해 다양한 영역에서 형제애적 사랑을 실천해오고 있다.
이같은 일치를 향한 일본교회의 모색은 역사에 대한 인식 확대와 공감대 형성이라는 결실로 드러났다.
1986년 일본교회는 일제시대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기에 이른다. 일본 주교협의회 회장 시라야나기 세이치 대주교는 일본의 전쟁 책임을 고백한 후 일제 치하 전쟁 협력과 신사 참배 문제를 중심으로 한 일본교회의 과거사를 성찰하는 자세를 보인다.
시라야나기 대주교는 또 1989년 일본의 전쟁 책임을 인정하고 중국의 가톨릭신자들에게 용서를 청하기 위한 일단의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어 1995년 2월 일본 주교단은 「평화에의 결의」라는 제목의 담화문을 발표해 아시아 각국에 대한 잔혹 행위를 인정하고 사죄를 청했다. 같은 해 4월 일본 정의와평화협의회도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어 1998년에는 일본 가톨릭중앙협의회 복음선교연구실에서 이전의 관련 자료들을 모아 엮은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발간하기도 했다.
최근에도 주교회의 명의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60주년 기념 평화 메시지 「비폭력을 바탕으로 평화로 나아가는 길」을 발표해 인류의 평화를 실현하는데 헌신하겠다는 결의를 재확인하는 등 성찰과 반성의 여정을 이어오고 있다.
8.15는 한국과 일본 두 민족, 아니 평화를 향한 모든 인류가 함께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원점이다. 일본교회가 걸어온 성찰과 화해를 위한 길은 올바른 자리매김을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함을 들려주고 있다.
■“자주 만나면서 무관심의 벽 허물어야”
‘보상과 화해의 순례’ 이끌고 있는 오카 신부
『역사에 대한 공감대 마련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한국과 일본 두 교회 신자들간의 만남과 교류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일본 사이타마교구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돌을 기해 지난 1995년부터 펼쳐오고 있는 「보상과 화해의 순례」를 이끌고 있는 오카 히로시 신부(사이타마교구 총대리 겸 마에바시본당 주임)는 인터뷰 내내 만남이 가지는 의미를 강조했다.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시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 크나큰 고통을 안겼습니다. 그러한 자신들의 역사를 모르고 자라는 젊은 세대들을 새로운 삶으로 이끌 수 있는 길은 만남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나 중학생 시절 종전과 한국의 해방을 맞았다는 오카 신부는 한국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엿보였다. 그것은 단순히 가해자로서의 보상심리가 아니라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한국교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바탕이 된 것이었다.
「보상과 화해의 순례」의 발의자이기도 한 그가 지난 1995년, 일제로 인해 피해를 입은 아시아교회를 향한 첫 순례지로 한국을 택해 40여명의 청년들을 모아 방한한 것도 그런 까닭인지 모른다. 이후 그는 매년 일본교회 신자들과 필리핀, 방글라데시, 몽골, 대만, 베트남 등 아시아지역 교회를 방문하며 현지 고아원과 장애인시설 등 사회복지시설에 신자들이 모은 성금을 전하는 등 화해의 길을 이어왔다.
지금까지 수십 차례 한국을 오가며 한국교회의 발전상을 가까이서 지켜본 오카 신부는 아시아와 보편교회에서 한·일 두 교회의 몫이 적지 않음을 강조한다.
『역사는 학교에서만 배우는 게 아님』을 역설하는 오카 신부는 『일본 신자, 특히 젊은이들 가운데는 역사에 무관심한 경향이 강하다』며 열정적인 한국 신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무관심의 벽이 허물어지길 바라는 모습이었다.
『서로 교류하며 형제애를 가꿔나갈 때 새로운 활로가 열릴 수 있으리라 봅니다. 새로운 세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일 두 교회에 부여하시는 소명도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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