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지면에서 필자는 다니 4장을 강철왕 느부갓네살의 회심과 그 여정으로 소개한 바 있다. 성공, 출세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번영」과 「안정」을 가장 위험한 인생의 덫으로 본다. 하느님을 잊고 살게 하는 가장 최적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성공과 번영을 자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믿으며 하느님을 제외시키는 삶, 가장 위험한 삶의 형태인 것이다.
내용
다니 4장의 이야기는 느부갓네살의 꿈으로 시작된다. 기괴한 꿈을 꾼 그는 즉시 바빌론의 해몽가들에게 꿈 해석을 요구하지만 그들은 왕의 꿈을 해석할 수 없었다. 결국 왕은 다니엘을 부르게 되는데, 이렇게 느부갓네살의 꿈과 연결되어 이루어지는 바빌론 현자들과 다니엘의 대조는 이미 2장에서도 유사한 양식으로 보도된 바 있다.
꿈 이야기의 중심에는 큰 나무가 등장한다. 그 나무는 땅의 중심에 서 있는 것으로서 그 끝이 하늘까지 닿아 있었는데 짐승들과 새들이 가득 모여와 둥지를 틀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4, 7).
이러한 그의 꿈은 「거룩한 감시자」(4, 11)에 의해 나무가 잘려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나무는 뿌리등걸만 남겨진 채 잘려지고 깃들였던 동물들도 모두 사라지게 되며, 그는 이후 짐승처럼 7년을 살게 된다.
이상과 같은 꿈의 비극적 내용이 다니엘을 당황하게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이 나무의 주인공이 바로 왕 자신이라는 것을 밝혀준다(4, 19).
한 나라의 왕을 나무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것은 민담이나 전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신 것도 이와 유사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를 통해 자신을 너무 높게만 간주해오던 느부갓네살에게 이제 가장 비참한 위치로의 추락이 다가옴이 경고된다. 이어 다니엘은 정의와 자비를 베풂으로써 이 죄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한다(4, 24).
1년이 지나서 꿈은 그대로 현실로 돌아왔다(4, 25~26). 왕은 정계에서 밀려나 짐승들이 사는 곳에 피신하며 오랜 시절을 보내야 했고(4, 30), 이 때 왕은 다니엘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속죄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보시고 하느님은 다시 영광과 영예를 회복하여 주시는데, 이러한 은혜에 보답하여 드리는 느부갓네살의 찬양으로 이야기는 끝맺어지게 된다(4, 31~34).
나보니두스의 이야기
다니 3, 31~4, 34의 이야기는 느부갓네살의 꿈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사실상 학계에서는 이 이야기가 바빌론의 마지막 왕이었던 나보니두스(기원전 556~538)의 이야기였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바빌론의 실록은 나보니두스가 그의 재위기간 중 10년간을 아라비아에 있는 테마(Tema)에서 지낸 적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니 3, 31~4, 34에 소개된 나보니두스 전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콜린스(J.J. Collins)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안한다. 다니 3, 31~4, 34은 나보니두스의 전승들을 토대로 한 것인데, 다니엘서의 저자가 이 전승을 자신의 책에 도입할 때, 나보니두스라는 인물보다는 다니 1~3장에서 이미 언급되었고, 유다 독자들에게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던 인물, 즉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무너뜨렸던 장본인인 느부갓네살의 이야기로 내용을 재구성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가설이 설득력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처음 세 구절에서 느부갓네살의 입을 통하여 하느님 왕권에 대한 찬양과 신앙고백을 하게하고, 또한 마지막 부분에는 그가 공적으로 서한을 띄워 만민에게 하느님의 통치와 그 주권을 공적으로 언표 하는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성서 저자의 자유스럽고 개방적인 편집, 교정을 통한 신학적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오버 더 레인보우
옛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노래 「오버 더 레인보우」. 무지개를 좋아하는 필자가 놓칠 리 없는 노래이다. 무엇보다도 「어딘가에 있을 무지개 저편」(Some where over the rainbow)이라는 예쁜 가사는, 옛 LP판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잡음과 혼합되어, 거부하기 어려운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어제도 거짓말 같지만, 소나기 때문에 검게 내려앉은 구름 뒤편에, 노을을 담아 분홍빛을 띠고 있는 구름을 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수녀원 모원에 와야만 비로소 하늘을 볼 여유를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공과 성취를 향해 돌진하는 삶은 늘 피곤하고 고통스런 여정이다. 그러한 고통의 끝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니 4, 31) 느부갓네살의 마음으로 이 여름의 끝에 만난, 그 검은 구름 사이에 비치던 차갑고도 맑았던 하늘, 쉽게 잊지는 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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