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 아닌 사랑의 씨앗 뿌려”
「하얀 감자꽃이 북녘 땅의 아픔을 덮는 그날을 위해」
이제 이름마저도 낯설지 않게 떠오르게 된 평양. 9월 8일 오전 11시 평양 인근에 위치한 농업과학원에서는 북녘 땅에 감자꽃이 만발하고, 배고픔을 잊은 이들의 웃음이 넘칠 그날을 기원하는 희망이 피어올랐다. 북한의 식량난을 덜어줄 사랑의 감자싹을 틔우기 위한 「씨감자 무균종자 배양시설」 축복식이 열린 것.
「Caritas corea」(한국 카리타스) 마크가 곳곳에 선명한 건물에서 열린 이날 준공 행사에는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장 유흥식 주교와 총무 황용연 신부를 비롯해 각 교구 사회복지 관련 담당 신부 등 남측 관계자와 북한 농업과학원 계영삼 원장과 대외과학기술교류처 리일섭 처장, 최고인민회의 박희덕 대의원, 조선민족경제협력연합회 개선무역총회사 리영호 사장, 농업과학원 농업생물학연구소 강신호 소장 등 북측의 고위관계자들이 함께해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갈 기념비적인 출발에 간절한 소망을 더했다. 연건평 151평, 배양실 90평, 외형적으로 화려하거나 그리 눈길을 끄는 것도 없는 이 시설은 한국교회사는 물론 민족화해의 역사에 의미있는 걸음으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이날 행사는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가 북한에 씨감자 생산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지난 7월 중순 본격적인 시설 공사에 들어간 후 1개월여만의 일로 남북 화해의 도정에 새로운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질 만하다. 1995년부터 이어져온 대북 지원에 심각한 피로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 들려온 이 소식은 올 겨울 어린이와 노약자 등 취약계층 650만명 가운데 상당수가 아사위기에 내몰릴 것이라는 세계식량계획(WFP)의 경고가 다급하게 들리는 가운데 날아온 희소식이어서 반가움을 더했다.
『씨감자는 단순히 목숨을 이어가는 먹거리를 낳는 종자가 아니라 더 큰 희망을 잉태하고 길러갈 사랑의 씨앗인 셈이지요』
1998년부터 씨감자 지원사업을 추진해온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총무 황용연 신부(대전교구)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씨감자 생산사업은 북한의 식량난 해결을 위한 획기적인 농업개발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한국교회 관계자들의 관심과 애정은 남다르다. 준공된 시설이 오는 10월 본격 가동에 들어가면 빠르면 내년 상반기부터 수확이 가능해진다. 하루 10만개의 무균종자가 생산되는 초기 과정을 거쳐 배양시설이 완전히 구축되는 2년차부터는 하루 30만개의 종자 생산이 가능해져 연간 1억개의 생산 규모를 갖추게 돼 식량난 해소에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는 셈이다. 이를 위해 시설 건립과 동시에 지난 8월부터 남측 전문가들이 배양기술 전수를 이미 마친 상태다. 민족화해와 나눔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한국교회는 씨감자가 갖는 이런 상징성과 의미를 간파하고 일찌감치부터 눈을 돌려왔다. 북한동포에게 식량을 지원하기 위해 뜻을 모은 신자들이 만든 「한겨레 영농법인」(이사장=황용연 신부)이 지난 2003년 9월 중국을 통해 식량용 감자 1200자루(62톤)와 함께 처음으로 10여톤의 씨감자를 북한에 보낸데 이어 이듬해에는 씨감자를 보내기 위한 기금조성을 위해 대대적인 자선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도 지난 2003년 말 북측과 「씨감자 배양시설 기술 이전」 등 농업생산성 향상을 위한 지원에 합의한 후 이 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다. 또 아시아 각국 카리타스와 선진국 교회 개발원조기구가 공동 설립한 아시아인간발전협력체(APHD)도 2004년 9월 북한 농업개발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씨감자를 지원키로 하고 대표단을 북한에 파견해 미화 8만3500달러 상당의 씨감자와 농약 비료 등의 지원방안을 최종 협의하기도 했다.
그간 기울여온 이런 노력이 화해의 여정에 뿌리내리고 사랑으로 결실을 맺게 하는 몫은 신자들에게 주어졌다. 배양에 필요한 자재와 씨앗 등 소모품 지원은 물론 꾸준한 기술 개발과 지원 등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씨감자 생산은 단순히 먹거리를 나누는 일이 아닙니다. 생명을 함께 키워가며 미래의 희망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생명인 먹거리를 나누는 과정에서 통일의 미래를 떠올리게 된다는 유흥식 주교의 말은 북녘 땅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을 엿보게 한다.
■배양시설 축복하고 온 유흥식 주교
“물고기 주지 않고 잡는 법 가르쳐야”
9월 10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입국장을 통해 들어서는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유흥식 주교의 얼굴은 예상보다 밝았다. 한국교회의 지원으로 북녘 땅에 들어선 씨감자 무균종자 배양시설을 축복하기 위해 지난 5일 출국장을 나서던 모습에 몇 겹의 희망이 더해졌음을 짐작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체험이었습니다. 우리 눈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고자 해야지요』
공항에서 이뤄진 인터뷰 중 유주교의 첫 마디는 이번 방북단의 성과를 가늠할 수 있게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을 떠난 지 사흘만인 7일 오후에야 고려항공편으로 평양 순안공항을 통해 처음으로 북녘 땅을 밟은 유주교는 이후 북측 관계자들과의 만남 속에서 「지혜로운 자세」가 필요함을 절감했다고 밝혔다.
『씨감자 종자 배양시설 준공도 배고픈 이들에게 물고기만 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면에서 지혜롭게 돕는 자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좋은 것을 찾아낼 수 있는 지혜와 사랑의 눈을 청하며 배양시설 공정 과정과 관련 시설 등을 둘러봤다는 유주교는 앞으로도 그들에게 가닿아야 할 도움의 손길을 꼼꼼히 헤아려본 모습이었다.
방북 기간동안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는 북측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의 애타는 목소리를 확인한 유주교는 이번 배양시설 준공이 북녘 땅은 물론 한반도 전체에 새로운 길을 열어놓은 의미있는 걸음이었음을 강조했다.
『한국교회는 북녘 동포 돕기에 있어서 지금껏 모범을 보여 왔습니다. 앞으로도 복음적으로 준비되고 복음적인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길을 걸어갈 수 있으면 합니다』
이번 발걸음이 하루빨리 결실을 맺어 북녘 동포들이 식량 걱정을 더는 것은 물론 건강 증진에도 기여하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 유주교는 북한의 위정자와 백성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을 요청했다. 아울러 그는 『굶주리는 이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게 우리의 분명한 의무』라며 『교회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모범은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나아가 유주교는 배양시설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과 함께 북한의 시·군 단위 보건소와의 자매결연을 통해 북녘 동포들의 건강까지 책임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기꺼이 나서겠다는 희망도 피력했다.
『뜨겁게 마음을 열고 다가서는 게 우리의 일이자 몫입니다. 주님의 길을 찾아 노력하는 게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이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사진설명
▶축복식 후 북한관계자들과 배양시설 앞에서 기념촬영했다.
▶배양실에서 감자종자 배양작업을 하고 있는 북한기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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