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과 대립 슬기롭게 극복
평화로운 공존이 당면 과제
흔히 현대의 종교적 상황을 「다종교 상황」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현대의 다종교 상황은 단순히 숫자상으로 종교가 여럿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교가 여럿인 것이 현대에 와서 처음 벌어진 상황이 아니니 굳이 새삼스러운 일로 주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종교 상황의 초점
현대 다종교 상황의 초점은 여러 종교들 사이의 갈등과 대립의 문제, 그리고 공존과 조화의 문제이다. 지금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종교로 인한 갈등과 대립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하면 서로 다른 종교들이 지구촌 인류 공동체 안에서 공존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지의 문제가 현대 사회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의 다종교 상황과 연관하여 「종교간 대화」에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여러 관련 단체들이 종교간 대화를 위한 실천적 노력에 힘쓰고 있고, 각 종교 교단의 당사자들도 여러 채널을 통해 대화와 교류를 시도하고 있다. 실제로 서로 다른 종교를 대하는 전반적인 태도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현대 다종교 상황 속에서 종교간 대화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절감하고 이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아직도 종교간 대화의 의의와 원칙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 아쉽다.
원칙적으로 종교간 대화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고, 종교간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자체를 심각한 우려와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외형적으로는 종교간 대화의 현실성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종교간 대화를 통해 의도하는 바는 오히려 종교간 조화와 공존의 목적에 상반되는 사람들도 있다.
네 가지 기본 원칙
진정한 조화와 공존을 위한 종교간 대화의 기본 원칙을 대략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대화에 임하는 기본 전제로서 서로에 대한 대결 의식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 종교와 종교 사이의 관계는 서로에게 위협적이거나 도전적인 것이 아니라 같은 지향성을 지니고 있는 동반자이자 협력자라는 인식이 전제되었을 때 진정한 의미의 대화가 가능할 수 있다.
둘째, 숨은 의도를 지닌 대화는 결코 진정한 조화와 공존을 이룰 수 없다.
상대방을 파악하고 대비할 수 있는 정보를 얻으려는 의도를 지니고 대화에 임하는 것은 여전히 상대방에 대한 대결 의식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바람직한 대화의 태도일 수 없다.
셋째, 서로의 우열가름이나 가치평가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진정한 대화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상대적인 우월의식이나 자기중심적 가치평가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마음과 상반되는 태도이다. 아울러 종교들 사이에 우열을 가름하고 가치평가를 적용하는 것 자체가 적합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넷째, 종교간 대화는 상호보완적인 이해를 지향해야 한다.
종교간 조화와 공존을 위한다고 해서 무조건 개체성을 무시한 혼합주의를 시도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진정한 대화는 각자의 독특성과 고유성이 존중된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진정한 대화는 각자의 독특성과 고유성이 서로에게 새롭고 풍부한 생명력을 제공해주는 것, 그리고 이러한 상호보완적인 교류를 통해 인간의 전체적인 종교성이 보다 다양하고 폭넓게 구현되는 것을 지향한다.
보다 현실적인 중요성
종교간 대화는 인간의 종교적 추구를 폭넓게 구현하기 위한 지향 이외에도 보다 현실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인류 공동체의 평화와 공존을 위한 일이다. 현재 인류 공동체는 「다름」으로 인한 갈등과 대립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당면 과제를 안고 있다. 인류 공동체가 극복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심각한 대립 문제가 종교로 인한 「다름」이라 할 수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직접적인 노력이 바로 종교간 대화인 것이다.
오지섭 (서강대 종교학과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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