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일치와 화해의 상징인가
종교와 종교를 가르는 벽인가
어둠이 짙어질 무렵 주위를 한번 돌아보면 꽤나 많은 십자가 네온싸인이 밝혀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비단 어느 특정지역에서뿐만이 아닐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십자가는 우리네 삶에 아주 가까이 자리잡게 되었고, 그래서 때로는 익숙한, 때로는 흔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가 되었다.
두 선이 교차하는 아주 단순한 형태, 그러면서도 복합적인 상징을 지닌 십자가는 사실 그리스도교 이전 고대 사회로부터 사용되어 왔던 상징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무엇인가 귀중한 물건을 담아놓은 그릇에 십자표시를 하기도 하고, 또는 금(金)을 나타낼 때도 십자표시를 사용했다고 한다.
문화적으로 차이는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십자가는 영원성, 생명 등과 같은 종교적 가치와 연결되었고, 또한 위와 아래, 양 옆을 연결하는 형태상의 특징으로부터 조화와 일치, 그리고 하나됨을 의미했다.
고대로부터의 내려오는 이러한 십자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인류구원 사업을 통해 그 내용이 심화되었다. 십자가의 중심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리잡게 되었고, 그 분을 통해, 그리고 그 분을 향해 모두가 하나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로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초기그리스도교 시기에 지어진 라떼라노 대성당의 제대 뒤편에는 생명의 물줄기가 흘러나오는 십자가를 사이에 두고 두 마리의 사슴이 물을 마시러 찾아 든 장면을 그린 모자이크가 있다. 이 두 사슴은 유다인과 이방인을 각각 상징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다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의 약속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화해와 일치의 상징인 셈이다.
십자가는 구원 역사의 중심이자 온 백성이 만나는 자리이고 십자가 아래서 모두가 하나된다는 의미이다. 범우주적이고도 영구적인 속죄의 힘을 지닌 십자가 때문에 온 민족이 함께 모이게 되고 하느님과 연결된다는 사상이 드러난 작품이다.
이와 같이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서 은총을 발견한다는 관념은 초기 그리스도교회화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성 이레네오는 『십자가 나무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의 역사가 모든 이들에게 분명히 드러났다. 그분의 손은 모든 인간들을 한데 모으시기 위해서 뻗쳐진 것이다. 두 손이 밖으로 펼쳐진 것은 지상에 흩어진 두 백성을 하나로 모으시기 위함이었다』라고 역설하였으니, 십자가는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그들의 율법과 지혜에서 해방시켜 서로 화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각자에게 있어 십자가가 진정 일치와 화해의 상징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종교 다원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십자가가 오히려 나의 종교와 남의 종교를 가르는 벽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되물어볼 일이다. 다른 종교와의 관계는 접어두더라도, 같은 십자가 아래 모여있는 신자 공동체는 어떠한가? 출신 지역, 학벌, 연령, 경제력 등 여러 기준에 따라 좁은 울타리를 치고 편협한 잣대로 끼리끼리의 집단을 만들어 가고 있지는 않은지?
거리에서 자주 듣게 되는 『우리 교회로 오세요』라는 말이 진정 『우리』 교회를 의미하기를 고대한다.
조수정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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