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 6장은 「사자굴 안에 갇힌 다니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성서의 그 어느 내용보다 잘 알려진 부분이다. 여기서 넌센스 퀴즈 하나. 여러분들, 세상에서 사자굴에 갇힌 다니엘보다 더 비참한 존재가 누군지 아시는가? 정답은 그 굴 안에 있던 사자이다. 배는 고파 죽겠는데 다니엘을 잡아먹고 싶어도 천사가 입을 틀어막고 있으니(6, 23참조) 약이 올라 심장이 터질 것 같고, 그래도 명색이 「동물의 제왕」인데 그 앞에서 하나도 놀라지 않고 순한 눈망울로 앉아 있는 다니엘 때문에 자존심과 스타일을 구겼으니 그 또한 절대로 남들이 알아선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차분함과 순수는 때때로 상대의 억장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가만있자, 주인공은 사자가 아니었지. 수다는 접고 다시 다니엘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하자.
아무튼 다니엘이 그런 불가능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기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도로 이루어진 탄탄한 일상과 그로 인해 쌓여진 하느님과의 돈독한 우정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강한 내면적 힘으로 자신을 지키게 하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부분이 없지 않지만, 이 이야기는 일상의 기도가 왜 기다림이요 용기인지, 그리고 왜 그러한 힘이야말로 가파르기 만한 삶의 굴곡을 오르는 우리의 소중한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인지를 가르쳐 준다.
전체의 내용
다른 에피소드처럼 6장의 이야기도 역사적 정황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표현되어 있는데, 우선 메데 사람 다리우스(9, 1과 11, 1에도 등장)라는 인물이 그러하다. 역사적 기록에 의한다면 페르시아의 고레스 이전에는 그러한 인물이 통치했던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야기는 메대의 다리우스가 아니라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 때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오류는 저자가 고레스 이후의 통치자를 이전의 인물로 착각했거나, 아니면 이야기 자체를 철저하게 허구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적 사건들을 어긋나게 보도하는 문학적 기교를 적용한 것일 수도 있다.
이야기의 주요한 내용은 다니 3장과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3장의 젊은이들이 활활 타는 화덕 속에 던져졌다면 6장의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졌고, 이야기의 뼈대 역시 거의 동일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다니엘은 동료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질투에 혈안이 된 동료들은 다니엘을 궁지로 몰아넣을 계략을 꾸민다. 다니엘은 신앙이 그를 고립시키는 단서였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를 철회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한 신앙으로 이 위기를 견뎌낸다. 결국 그는 사자굴 안에 들어가게 되는 극형을 받게 되지만, 그 속에서도 예의 평온함을 유지하며 구출된다. 이러한 기적을 보고 왕은 다니엘의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6장의 마지막(29절)은 다니엘이 고레스 통치까지 살았음을 보도하는데, 이는 다니엘이 고레스 원년까지 왕궁에서 살았다는 1, 21의 내용과 맞물려 있고, 이렇게 6장이 1장과 편집적으로 조응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다니엘서 전반부(1~6장)의 기나긴 여정이 마쳐짐을 암시하고 있다.
칼을 잡는 것보다 더한 용기, 기도
타인의 부정적 시선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 같이 자신을 지켜갈 수 있는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다니엘은 금령의 내용과 자신이 모함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처럼 예루살렘을 향해 창이 나있는 다락방에서 하루 세 번 기도를 바친다(11절). 이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원칙에 철저하고 이 확신으로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단호함이 바로 구원의 힘임을 강조하고 있다.
제가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다고 느껴질 때, 이내 마음이 복잡해지고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은 누구나 체험하는 인간의 본성이요, 한계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사자굴에 들어간 다니엘과는 비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이내 우리는 죽음을 체험하고 만다. 「잡아먹히기도 전」에 이미 「잡아먹힌 듯한 느낌」에 마음이 무너지고 마는 것인데, 그런 무서운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는 본질적 이유는 타인인 「그들이」 내 삶의 주인으로 서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종말론적 연습」이라 하겠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는 하느님이외의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도 입을 벌려 그를 삼켜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 거짓말 같이 가을이 와 있다.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내 삶의 소중한 부분들을 빼앗기지 않을 때, 태풍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우리는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 그 분이 내 안에 계신데, 도대체 내가 누구를 두려워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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