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더위 무렵이었다. 후텁지근하지만 조금이라도 아껴보려고 에어컨의 유혹을 뿌리치고 부채질을 하며 업무를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신부님 복날도 가까워오는데 보신탕이나 한 그릇하지요』라고 한다. 목소릴 들어보니 몇 년 전 모 본당에서 보좌신부할 때 본당 신자였다. 반갑긴 했지만 별로 왕래가 없었던 분이라 느닷없는 보신탕일까 하는 생각에 되물었다.
『갑자기 전화하셔서 보신탕을 같이 하자고 하시니 놀랍네요. 무슨 하실 이야기라도 있으시나요?』했더니 그분 왈 『더위에 복지관 업무 힘드실 것 같아 모시고 싶습니다』라고 한다. 당혹스럽긴 했지만 잊지 않고 연락해주신 성의에 시내 모 식당으로 나갔다.
갔더니 그분 혼자 나오신게 아니라 지역 신자들 신심단체 모임의 간부라는 분들이 함께 계셨다. 회장, 부회장 소개를 받고 자리에 앉았더니 날 초대하신 분이 다른 한 신자분께 눈짓을 한다. 눈짓을 받은 신자분이 『신부님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하더니 5분 후 묘령의 아가씨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분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저렇게 참한 아가씨를 신부인 나에게 소개해주시길 위해서 이분들이 날 만나자고 했을까? 신심있는 분들이 신부 장가 보낼 일도 없을테고 그것도 보신탕집에서, 아닐테지…」하며 여러 생각을 했다.
보신탕이 상 위에 차려지자 한 신자분이 그 아가씨를 다그치며 『신부님께 인사드려』 한다. 그 참한 아가씨 인사하더니 상당히 쑥스러워 한다. 『얘가 제 딸입니다』 『무슨 일로 따님을 이 자리까지 부르셨습니까?』 했더니 그분 왈 『얘가 사회복지사 1급 자격을 취득했는데요…』하며 말을 얼버무린다. 날 초대했던 신자분이 끼어들며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부님 복지관에서 직원을 채용한다면서요? 그래서 어렵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앞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보신탕 맛이 삼 십리나 뚝 떨어진다. 「보신탕 한 그릇에 인사청탁이라, 기가 막히군…」
이웃 복지관 직원채용 정보를 듣고 내가 관할하고 있는 곳으로 알고 인사청탁을 잘못한 것이다. 기분이 매우 나쁘기도 했지만 우리 기관의 채용이 아니었기에 참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당혹감을 감추고 사실을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 아가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한 순간에 일그러진다.
묵묵히 보신탕을 한술한술 뜨며 그 자매에게 면접에 잘 임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 더 이상 보신탕이 안들어 간다. 『보신탕 잘 먹었습니다. 전 바빠서 이만…』
보신탕을 즐겨먹던 내 일생에 가장 맛없는 보신탕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 자리를 뜨며 씁쓸한 웃음과 함께 교회안의 세속화를 생각해보며 사제인 내가 얼마나 세속화되었을까를 헤아려 본다.
-박공식 신부 〈나주 노인복지회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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