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목실의 위상과 종교를 넘어선 원목
하루 3회 미사…병실 TV로 중계
사제가 환자·직원 교육까지 맡아
원목실을 중심축으로 병원 운영
서울대교구 사목국 일반병원사목부(담당=정진호 신부)는 9월 11일부터 16일까지 5박6일간 필리핀에서 서울시내 13개 일반병원 원목사제와 수도자 16명이 참석한 가운데 ‘일반병원 원목자 연수’를 가졌다. 필리핀 수도 메트로 마닐라(Metro Manila)의 4개 병원을 방문한 원목자들은 현지 원목 사제.수도자들과 만나 정보를 교환하고 필리핀의 병원사목 현황과 활동을 참관했다. 아울러 이를 토대로 한국교회 일반병원 사목의 발전방향을 논의했다. 본지는 원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필리핀 병원의 모습과 선진화된 임상사목교육(CPE) 시스템 아래 환자들을 위한 전인치료에 나서는 원목 현장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필리핀 메트로 마닐라=이승환 기자】 필리핀 병원의 가톨릭 원목이 주목을 받는 것은 필리핀의 오랜 식민사(史)에 기인한다. 16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필리핀은 현재 인구의 80% 이상이 가톨릭신자다. 환자 대부분도 신자이다 보니 가톨릭원목은 그만큼 활발하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원목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원목의 본고장인 미국의 영향 때문. 필리핀은 40여 년 넘게 미국의 지배를 받았고 독립 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오랜 원목의 역사를 가진 미국의 축적된 경험, 즉 ‘튼튼하고 촘촘한 그물’을 전수받은 필리핀은 대부분의 국민이 가톨릭 신자라는 ‘풍요로운 어장’ 아래서 보다 역동적인 원목을 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원목실과 원목자
9월 13일 방문한 ‘마카티의료센터’(Makati Medical Center)는 600병상, 의사 200명, 직원 1000명 규모의 대형병원이다. 교회가 운영하는 병원이 아님에도 센터에는 원목실과 성당이 따로 마련돼 있고, 매일 3회, 주일 4회 봉헌되는 미사는 각 병실에 설치된 TV로 중계된다. 매 번 미사 때면 성당이 비좁을 정도로 많은 신자들이 모인다. 병원 곳곳에 자리한 성상과 성물들, 벽에 쓰여진 성서구절들을 보면 마치 병원 전체가 하나의 성당인 것처럼 느껴진다.
원목실에는 원목사제 2명이 교대로 상주한다. 이들은 언제 어느 때 병동에서 호출이 올지 모르는 상황을 감안해 24시간 근무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환자를 돌보는 것이 비단 의료진의 몫만은 아님을 병원의 모든 구성원들이 알고 있어 원목사제는 그만큼 환자들을 만나고 돌보기 바쁘다.
“신부님이 병원의 수많은 환자들을 영적으로 돌봐주시는 것이 그들을 위한 진정한 치료입니다. 저희는 그저 신부님의 활동에 도움이 되도록 육체적인 보살핌을 행하는 것뿐입니다.”
병원 원목실 데이빗 턴빌(David Turnbill) 신부를 통해 전해들은 마카티의료센터 원장의 말은 병원이 원목실과 원목자들의 역할을 얼마나 중요히 여기는지 엿보게 한다.
원목에 대한 병원의 적극적인 지지는 이튿날 방문한 ‘필리핀 국립심장센터’(Philippine Heart Center) 원목실에서도 찾아 볼 수 있었다. 병원 한 층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는 원목실은 사무실과 성당, 교육실, 그리고 야외기도실 등까지 갖추고 있었다. 원목사제 한 명이 상주하는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규모다.
원목실의 프레디 페놀리어(Freddie Penoliar, 가밀로회) 신부는 기본적인 원목 외에도 신입직원 대상 원목실 소개 교육과 환자 강의, 병원 윤리위원회 위원 등 병원 전반에서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환자 뿐 아니라 병원 직원들을 위한 교육까지도 원목사제에게 맡기는 것은 원목실의 역할이 병원을 이끌어가는 중심축에 자리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페놀리어 신부는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이곳 환자들은 삶과 죽음 사이를 급박하게 오가고 있어 다른 어떤 환자들보다 영적 보살핌이 더 필요하다”며 “이를 알고 있는 병원이 원목실을 전폭적으로 돕고 원목실 또한 그 기대에 발맞춰 환자들을 보살피고 있다”고 말했다.
다종교인 한국과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신자인 필리핀을 저울질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겠지만 원목을 단순히 선교수단으로 인식하는 한국의 일반병원과 비교할 때 필리핀 국립심장센터와 마카티의료센터가 원목실에 쏟는 지원과 관심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공회 운영 병원
9월 14일 찾은 ‘성 루가 의료센터’(St. Luke’s Medical Center)는 필리핀에서 유일한 성공회 운영 병원이다. 물론 원목자도 성공회 신부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환자 대부분은 가톨릭신자이다. 성공회 신부가 가톨릭신자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원목을 할지 의문이 앞선다.
16년간 이곳 원목실에서 일해 온 티노 신부는 “원목은 종교의 같고 다름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환자들이 마음 편히 병원에 머물며 영적으로 치유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며 “그들에게 성사를 주진 못해도 같이 손을 잡고 기도는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티노 신부의 말처럼 성 루가 의료센터 원목실은 성공회와 가톨릭, 이슬람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 신자들을 위해 열려있고, 각 종교 원목자들을 환자와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환자가 특정 종교의 원목자를 찾으면 원목실은 이미 연계돼 있는 각 종교 원목자에게 연락을 취해 방문할 수 있도록 주선한다.
물론 이곳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는 병원이나 필리핀 내 일반 국립병원에서도 타종교 원목은 자유롭다. 하지만 성 루가 의료센터의 원목이 필리핀 내 다른 병원, 그리고 한국의 일반병원에 비해 눈에 띄는 것은 병원 운영 주체인 성공회라는 종교 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오로지 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를 돌본다는 일관된 목표를 갖고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연수에 참가한 원목자들은 성 루가 의료센터가 다종교 국가인 한국의 일반병원과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평가하고, 이곳의 원목을 한국 일반병원 사목의 모델로 삼아 발전시켜 나갈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데 공감했다. 종교에 따라 혹은 운영주체의 성격에 따라 원목에 있어 심한 기복을 나타내는 한국의 상황과는 큰 차이점을 보이고 또 충분히 배워야 할 점이 많다는 의미다.
최명분 수녀(중앙대학교 용산병원 원목실)는 “오로지 가톨릭신자만을 위한 원목에만 치중하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했는데 원목은 모든 종교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티노 신부의 말에 느낀 점이 많다”며 “모든 환자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 그들의 아픔과 고충을 보살펴 줄 수 있는 것이 원목자의 참 역할임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김보경 수녀(건국대학교 병원 원목실)도 “성 루가 의료센터를 보며 각 종교가 원목을 새로 시작하는 우리 병원과 상황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며 “가톨릭, 개신교, 불교 등 세 종파가 대화와 협력을 통해 이상적인 원목을 해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았고 또 그것을 위해 함께 힘을 모아야겠다는 열의가 생겼다”고 말했다.
■일반병원사목부 교육담당 최수복 수녀
원목의 필요성 인식
사제의 헌신 인상적
“병원 운영진과 의료진이 원목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배려하는 모습, 그리고 어느 병원에 가도 원목자를 반기는 모습이 깊이 와 닿았고 한편으로 부러웠습니다”
일반병원사목부 교육담당 최수복 수녀(성심 수녀회)는 원목환경이 좋은 것뿐 아니라 원목에 헌신적으로 임하는 원목자들의 모습도 인상 깊었다고 밝혔다.
필리핀도 국가 전반의 경기침제로 병원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병원 규모와 높은 가톨릭신자 비율에 비해 원목자 수는 적다. 500병상 규모의 대형병원에도 원목자는 1명 또는 많아야 2명이다.
“신부님 한 분이 매일 서너 대의 미사를 집전하고 환자를 방문해 성사를 주고, 병원 직원 교육까지 담당하더군요. 그러면서도 힘든 내색 없이 원목자로서의 소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며 느낀 바가 컸습니다”
이와 함께 최수녀는 “원목자 양성을 위한 교육이 한국과 달리 병원이라는 현장에서 체험 위주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적이었다”며 “필리핀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원목자 양성교육은 우리 교회의 원목자 교육이 자리를 잡는 본보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지난 해 미국에 이어 2년째 해외 원목 현황을 둘러 본 최 수녀는 “오랜 역사를 갖고 탄탄한 기반 위에서 활동하는 원목현장을 보며 원목자로서의 정체성을 되새기고 역할을 재정립할 수 있었다”며 “이번 연수는 교회의 일반병원 사목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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