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상 밟으면 살고
밟지 않으면 죽음뿐
후미에(踏繪)는 그리스도교가 금지된 에도시대에 기리시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마리아 등의 성화상을 밟는 행위를 말한다.
실제로 보여진 것은 1631년 운젠지옥 고문 때였다. 유황 열탕 고문을 받고 넘어진 갈바리오 신부에게 예수님상을 가지고 와서 『밟아라』고 하였다. 신부는 피부가 벗겨지고 부어올라 피투성이가 된 발을 보면서 말하였다. 『그것을 밟을 정도라면 이 발을 잘라버리겠다.』
나가사키에서 시작된 후미에가 본격화 된 계기는 1657년 잠복 기리시탄이 노출되어 처형된 이후부터이다. 그 후 매년 전 국민에게 실시하여 야소교(耶蘇敎=예수교)와 그 사도들을 거부하고 저주하는 증거로 하여 메이지(明治) 초년까지 실시되었다. 나가사키에서는 매년 정월 둘째 날부터 각 마을의 촌장이 성화상 판을 자기 동네로 빌려간다.
다음은 후미에 당일의 모습이다.
「동네 어른 감독자가 들어와 앉으면 관리인은 상자에서 성상 판을 꺼낸다. 서기는 후미에 장부를 들고 한 가족의 가장으로부터 하인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 그 이름을 부른다. 우선 가장의 이름을 부르면 가장은 관리인에게 일례를 하고 성화상을 밟는다. 양말은 미리 벗어둔다. 성상이 거의 발에 덮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확히 밟아야한다. 잘못하면 다시하게 된다. 성상 앞에서 허리를 굽히거나(경배) 무엇인가 중얼거려도(기도) 의심을 사게 된다. 그로부터 처자 순서로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후미에를 한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가 안고 가서 성상 판위에 발을 놓게 한다. 병자에게는 그 집으로 가서 관리인 입회하에 병자의 발을 성상 판위에 놓게 한다. 한 가족의 후미에가 끝나면 서기는 장부에 날인을 받는다. 이리하여 다음 가족으로 옮겨간다. 후미에의 의식은 대단히 엄중하였다.」
후미에는 외국인들에게도 행해졌다. 오란다인은 데지마(出島) 상관에서 하고 표착된 선박은 관리인이 금제와 성상 판을 가지고 배에 들어가서 행하였다. 표착 조선인에게도 나가사키 법정에서 대마도 영주의 신하와 조선어 통역관 입회 하에 성화상을 밟게 하였다. 조선인이 많이 사는 이세마치는 1월 6일에 후미에를 행하는 날이었다.
후미에를 하는 날은 기리시탄들이 정신적 고문을 당하는 날이다. 성상을 밟으면 자신의 양심은 진흙탕이 되고 밟지 않으면 생명을 잃게 된다. 생명을 버리고 양심을 지킬 것인가, 양심을 버리고 육체의 생명을 연장할 것인가, 엄한 선택의 길에 서서 고통당하는 기리시탄들이었다. 후미에를 하는 날, 될 수 있는 대로 발을 깨끗이 씻고 성상의 머리부분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살짝 밟도록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끝나고 와서는 성상을 밟은 발을 씻어 그 물을 보속으로 마셨다. 그리고 완전 통회의 기도를 바쳤다.
후미에는 배교행위임에 틀림없다. 배교행위를 매년 행하면서도 신앙을 지켜온 기리시탄들의 마음에 한 가닥의 위로는 완전 통회 기도였다. 이 기도는 잠복 기리시탄들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기둥이 되었다. 기리시탄들은 매년 후미에를 하며 생명을 이어가서 250년 동안 신앙을 전승해 왔다는 것이다. 1865년 나가사키 오우라 성당에 나타난 잠복 기리시탄 자손들이 그들이었다.
박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