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랑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이들이 쉬는 곳”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 즉 나귀에 타고, 인간이 재난을 당한 곳으로 서둘러 가, 그 상처를 치유하고, 인간을 자신의 나귀 위에 태웁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쉴 곳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이들이 쉴 수 있도록 말입니다(마태 11, 28).
‘아가 강해’ 14, 428에서
[해설]
“율법, 실천해야 의롭게 돼”
올 여름 법정 스님의 오랜 베스트셀러 ‘무소유’를 처음 읽었습니다. 거기에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잊을 수 없는 이야기 하나가 들어있습니다. 법정스님은 젊은 시절, 한번은 수연(水然)) 스님이라고 하는 분과 함께 결제(結制)에 들어갔는데, 그만 도중에 몸살이 나 끙끙 앓아누웠습니다. 그런데 수연 스님은 다음날 새벽 일찍 어딜 가더니 밤늦게야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약을 달여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약을 받아먹으며 법정 스님은 크게 울었다고 합니다. 수연 스님은, 서로 한 푼도 가진 것이 없기에, 도반(道伴)을 위해 암자에서 수십 리를 걸어가 탁발을 하여 약을 사가지고 다시 수십 리를 걸어오느라 그렇게 늦었던 것입니다.
그 잊을 수 없는 수연 스님의 특징을 법정 스님은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는 맑은 시선과 조용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과 말이 없는 행동에 의해서 혼과 혼이 마주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었다.”
예수회의 하워드 그레이 신부님은 한 피정 강론에서, 교회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먼저 이웃을 잘 살펴보아야하고(관상적 차원), 깊이 공감하며(정서적 차원), 구체적으로 행동해야한다(실천적 차원)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도미니코회의 미야모토 히사오 신부님은 자신의 여러 저서에서, 인간 상호간 및 성령과 함께 하는 교회 협동태(協同態)는, 자폐적으로 고정된 실체 즉 공동체가 아니라, 스스로도 세계 내에서 이방인(사마리아인)처럼 끊임없이 역사의 한가운데를 여행하면서, 다른 민족, 난민, 다른 문화 등 타자와 만나 화해하고 성장하는 개방태(開放態)이어야함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자기 탈자(脫自)와 타자 환대(歡待)의 모습을 보여주며, 거기에 우리들도 참여하도록 초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가’ 제5장에서, 신랑의 몸 전체의 아름다움을 조목조목 찬미하는 신부의 대담하고도 능동적인 묘사를 읽습니다. 그 옛날에, 남성의 신체가 여성에 의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표현된 노래가 또 어디 있을까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마지막 16절에서, 신부는 신랑에 대한 신체적 찬가 모두를 총괄하는 듯이 “바로 이런 분이 내 가까운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가까운 분’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가 10, 30~35)를 중첩시켜 관상하며 이를 구세사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 이웃은 누구입니까?”(루가 10, 29)
이에 대해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비유를 들어 인간에 대한 사랑의 섭리의 전모를 제시합니다. 즉 인간의 천상계로부터의 하강, 도적들의 함정, 썩는 일이 없는 옷을 빼앗김. 거기에 덧붙여, 죄로 인한 상처, 영혼이 불사에 머물러있는 채 죽음이 본성 한가운데까지 들어와 버리는 것. 게다가 율법이 무익하게도 통과해버리는 것. 즉 사제도 레위인도 도적의 손에 떨어진 자의 타박상을 치유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수소나 숫염소의 피로는 죄를 제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이사 1, 11 히브 9, 12~13). …그러므로 사람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분을 그 자신 안에 받아들여 환대합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두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그 율법학자도 대답했듯이, 그 하나는 온전한 영혼으로 하느님을 향해있는 사랑이며, 또 하나는 이웃에 대한, 자기 자신에 대한 것과 똑같은 사랑입니다(루까 10, 27). 그러나 “율법을 듣는다고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자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 2,13).
그렇기에 이 두 가지 화폐(즉 하느님에 대한 믿음 및 인간에 대한 착한 양심)를 받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맡겨진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몸소 행위에 의해 무언가 협력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여관 주인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재난을 만난 자의 치료에 관해서 그대가 부담한 몫은, 내가 다시 돌아올 때, 그대의 돌봄의 열의에 따라 지불될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는 인간에 대한 이와 같은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까운 분’이 되었습니다.
여관 주인이 착한 사마리아인에게서 데나리온 은화 두 닢을 받으며 더 필요한 돌봄을 부탁받았듯이, 교회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은화 두 닢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아서, 우리에게 맡겨지는 타자를 환대(歡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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