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능함이 어찌 부모 탓이랴마는, 다가오는 상처를 이기지 못하면 언제나 애꿎게 화살을 꽂는 곳은 부모님이다. ‘어쩌겠니, 그게 네 인생인걸.’ 부모 원망에 잔인하게 속을 긁어 놓는 철없는 딸에게, 힘없는 전화 목소리로 엄마가 해주신 말이었다.
삶이라는 회피할 수 없는 고통을, 마치 엄마가 나를 낳음으로써 고스란히 전해 준 듯한 자책이 서려 있는 말이어서 속이 더 뒤집어 졌다. 공교롭게도 그 다음 날 미사의 독서는 요나 이야기의 한 단락이 나와 있었다. 아주까리 잎으로 더위를 면할 그늘을 주시면 ‘그럼 그렇지, 내가 누군데’ 하다가, 잎이 말라 햇빛에 시달리게 되자 ‘이렇게 사느니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를 연발하는 요나. ‘내가 못살아…’를 연발하는 나의 모습 그대로를 보는 듯했다.
다니 9장은 70주간이라는 고통의 시간을 언급한다. 이 숫자가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이 한정된 기간을 통해 고통도 끝이 있음을, 삶이 아무리 견딜 수 없을 것 같아도 결국은 흘러가는 것임을 표현해 준다. 이를 통해 다니엘서는 박해의 고통 속에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를 연발하던 유다인들에게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는 희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 9장의 특징
다니 9장은 짧은 도입문으로 시작되고, 죄의 고백과 자비를 구하는 내용의 긴 기도문이 이어지며, 천사의 담화부분으로 마무리된다. 서로 다른 문학 양식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기간(70년)에 대하여 언급한 예레미야서 25, 11~12 29, 10를 해석하는 독특한 양식(미드라쉬)을 적용하고 있다.
전반적 내용과 구조
다니 9장의 전체적 내용은 이러하다. 어느 날 예레미야 예언서를 읽고 있던 다니엘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다시 회복되기까지 7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알게 된다(2~3절). 그러나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고심하고 하느님께 기도를 바친다. 이어 가브리엘이 등장하여 그 비밀을 풀어주는데, 이 부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일흔 주간’(24절), ‘일곱 주간’, ‘예순두 주간’(25절), ‘한 주간’(27절), ‘반주간’(27절) 등이 제시하는 시간 개념들이다. 정확하게 이 숫자가 어느 계산법에 의한 것인지 명시된 바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여기서 ‘주간’이라고 제시된 것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주간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점이다.
즉 우리는 일주간을 ‘칠일’ 단위로 보고 있지만, 다니 9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일주간은 ‘칠년’으로 구성된 개념이다(이와 같은 계산법에 대해서는 민수 14, 34 참조). 그렇다면 24절에서 언급된 ‘일흔 주간’은 곧 우리의 계산법으로는 7년(1주간)×70이 되어서 490년에 해당되는 기간이 된다.
같은 방법으로 계산하여 25절의 ‘일곱 주간’은 7×7이 되어 49년을 말하고, ‘예순두 주간’은 7×62가 되어 434년을 말하며, ‘한 주간’(27절)은 7년, ‘반 주간’(27절)은 삼 년 반을 의미한다.
다니 9장에 언급되어 있는 이 기간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학자들과 세간의 관심을 모아왔고, 이러한 논쟁을 중심으로 종말에 대한 계산을 주장하는 ‘시한부 종말론’도 각양각색으로 발생하였다.
현재까지도 개신교의 몇몇 교파들은 이 기간들을 종말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한 예고로 해석하고 있다.
곧 다니 9장에 등장하는 고통의 기간 ‘70주간’을 시간적으로 계산하여 시한부적 종말을 준비하는데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니 9장의 종말에 대한 상징적 기간들은 전적으로 다니 9장의 저자와 독자가 경험했던 당시의 혼란과 고통의 역사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해야 할 70주간(490년)은 정확한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기간이라기보다는, 레위 25장에 언급되어 있는 ‘희년’에서 영감을 받은 상징적 숫자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희년’이 ‘해방의 해’이듯이 ‘490년’은 고역의 시간이 지난 해방의 해를 의미한다.
한계도 아름다움이다
우리의 고통은 대부분 기대에 대한 좌절 때문에 생긴다. 엊그제 부모의 마음을 긁어 놓은 심술도, 사실은 의욕은 앞서지만 거기에 상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자신의 무능함에 상처받고, 그 부족함을 비웃는 이들이 많을까봐 또 상처받고…
혹시 저처럼 욕심이 많아 스스로 무덤을 파는 분들이 계시다면 들려드립니다. 제 수첩 한 귀퉁이에 적혀 있는 구절을요. ‘기대한 만큼 채워지지 않는다고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믿음과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