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교구 탄생에 헌신
10월 20일 서울 용산 성직자 묘역에서 봉헌된 브뤼기에르 주교(소 바르톨로메오) 선종 170 주기 추모·현양 대미사에는 3500여명의 신자가 참례, 늦게나마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을 드러내는 시간이 됐다.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 주례, 총대리 염수정 주교와 방한중인 프랑스 주교단, 서울대교구 사제단 공동집전으로 봉헌된 이날 미사에서 정대주교는 꾸준히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사업을 펼쳐온 한국교회사연구소 최석우 몬시뇰과 염수의 신부를 격려하는 한편 “모든 신자들이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삶을 본받길”당부했다.
삶과 신앙
“어찌하여 조선 전교를 머뭇거립니까? 과연 어느 사제가 이런 위험한 사업을 맡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조선 교우들의 사제 파견 요청을 여러 가지 불가능한 이유를 내세워 거절하는 파리외방전교회 회람문을 접한 브뤼기에르 주교가 1829년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낸 조선 선교를 자원하는 내용이 담긴 장문의 편지 중 일부다. 주교의 단호한 결심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1792년 프랑스 서남부 피레네 산맥 근처인 나르본 읍 레삭마을에서 태어난 소주교는 서북쪽으로 200여리 떨어진 카르카손 읍에서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마치고 1815년 사제품을 받았다.
수품후 4년여 모교인 카르카손 대신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다, 아시아 선교에 대한 강한 염원을 실천하기위해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한다.
첫 소임지로 태국으로 들어가 방콕에서 지내던 소주교는 교황청에서 조선교구 선교를 외방전교회에서 맡아 달라는 요청에 대해 전교회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에 격분한 소주교는 앞서 언급한 장문의 편지 속에 “조선 선교에 도움이 된다면 1년전부터 교황청이 요청해 온 주교직을 수락하겠노라”고 덧붙인다.
1829년 방콕에서 태국 보좌주교로 성성된 소주교는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가 조선 입국 기회를 엿보던 중, 1831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북경교구에서 조선교구를 분리, 신설하고 자신을 초대교구장으로 임명했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소주교는 1832년 8월 페낭에서 싱가포르와 마닐라를 거쳐 마카오로 이동, 조선 잠입을 구상한다. 이후 복건성과 양자강, 황하강를 건너 북경 인근을 지나 1834년 9월 만리장성을 넘게 된다. 이어 소주교는 10월에 서만자에서 두가지 기쁨을 누리게 된다. 하나는 모방 신부와 재회, 또 하나는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교구 전교를 맡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조선 입국을 위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한발 한발 조선 땅으로 다가가던 소주교는 1835년 5월 압록강에서 북으로 120여리 떨어진 봉황성 변문 근처에서 숨어 지내다 조선교우들을 만나 압록강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에 조선으로 입국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1835년 10월 7일 소주교 일행은 소위 ‘죽음의 행진’이라 불리는 ‘서만자에서 마가자까지’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소주교는 떠나기 하루 전날 마카오 주재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결의를 이렇게 적었다.
“저희는 내일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지금이 제 여행 중 가장 험난한 여정이 될 것 같습니다. 제 앞에는 온갖 장애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는 머리를 숙이고 이 미로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소주교 일행은 10월 19일 마가자(현재 내몽고자치구 적봉시 송산구 동산) 교우촌에 무사히 도착했으나 이튿날 소주교는 저녁을 먹은 후 갑자기 발병, 43세를 일기로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러한 소주교의 죽음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중국 땅을 눈앞에 두고 선종한 것과 유사하다.
굳건한 성품
소주교는 의지가 굳고 독립심이 대단한 인물로 전해진다. 그를 옆에서 본 어떤 교회 장상은 “그가 주교가 된다면 아마 그의 사목 표어는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누가 뭐라든, 나는 전진하리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패기와 끈기, 신심과 집념에다 치밀한 논리와 관찰에다 자신이 조선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더라도 조선교회가 사멸하지 않도록 조처한 예지와 예견의 능력은 감동적이다.
마가자 순례 현양비 축복
서울 개포동본당의 소주교 현양사업은 본당 설립 20주년을 보다 의미있게 지내기 위해 염수의 주임신부를 비롯 본당공동체 모든 구성원들의 합작품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본당의 과거는 20년사 출간으로, 현재는 성당의 개·보수로 의미를 갖게하면 되는데, 그러면 미래는?’.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한 개포동본당은 소주교의 이야기를 듣고, 외롭게 마가자에서 돌아가신 ‘소주교의 이루지 못한 선교의 꿈’이 곧 본당의 미래라는 예감을 갖게 된다.
이렇게 의문에서 시작, 엄청난 결실을 거둔 소주교 현양 사업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것은 지난 2월, 본당 회장단 등 현양위원회 위원들이 마가자를 순례하고 돌아왔다. 이때 이들이 내린 결론은 ‘힘들겠지만 본당을 위해서, 아니 한국교회를 위해서 해야만 한다’였다.
이어 3월에 마가자 답사 보고서 발표와 사진전 개최, 4월부터 소주교 현양 사업을 위한 기도를 시작한 개포동본당은 5월에 들어와서 한국교회 안에서 소주교의 위상을 드러내는 책 ‘착한 목자, 브뤼기에르 주교’를 발간하기에 이른다. 7월 마가자를 두 번째 방문한 후, 8월에는 마가자 순례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서울대교구 총대리 염수정 주교가 개포동 신자들의 힘으로 건립된 현양비와 안내판 등의 축복식을 주례한다.
여행기·서한집·CD 출시
이렇게 체계적으로, 꼼꼼히 현양운동을 펼쳐오던 개포동본당이 10월 7일 지금까지의 현양사업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와 서한집’(개포동본당 현양위원회 펴냄)을 발간했다. 여행기에는 소주교가 조선 포교지로 가야 한다는 결심을 굳힌 순간부터 마가자에서 선종할 때까지의 모든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서한집에는 소주교가 동료 사제들과 부모에게 보낸 편지들이 빠짐없이 수록돼 있다. 개포동본당은 이와함께 소주교의 생애와 성품을 담은 CD와 테이프도 출시, 현양운동에 도움을 주고 있다.
※구입문의 02-574-4744, 011-213-1032
■“한국교회 함께 현양사업 펼쳐야”
서울 개포동본당 주임 염수의 신부
“한국교회 기초를 마련하고 미래를 열어주신 분을 기억하자는 말입니다.”
본당 설립 20주년을 맞아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 사업을 펼쳐오고 있는 염수의 신부(서울 개포동본당 주임)는 이러한 사업의 의미를 ‘기초’와 ‘미래’라는 말로 함축했다.
염신부는 “한국교회를 보편교회와 일치하도록, 즉 교황청이 조선포교지를 독립된 교구로 설정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소주교님의 덕분”이라며 “이러한 점에서 한국교회의 기초를 만든 분”이라고 설명했다.
조선 포교지의 열악한 사정과 그곳에 가면 순교의 칼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브뤼기에르 주교. 하지만 누구보다도 조선 교우들을 사랑했고, 만나기를 원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아무도 조선 파견을 원치 않는 상황에서 선뜻 자원함으로써 한국교회가 형태를 갖추는데 한 몫했다는 말이다.
‘미래’라는 말을 염신부는 3가지로 요약했다. 첫 번째는 1833년 조선교구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도록해 여러 번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이 계속 조선에 들어올 수 있게 한 것. 두 번째는 1838년 신설된 만주 요동교구를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겨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에 큰 도움이 되게 한 것.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주거지와 은신처를 제공 받기도 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모방·샤스탕·앵베르 신부 등 뛰어난 선교사를 발탁해 조선 선교를 맡겼다는 사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해서도 탁월한 혜안을 갖추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염신부는 “한국교회의 미래는 뿌리 찾는 작업에서 출발해야 한다”며 “뿌리, 즉 시원(始原)은 모든 것의 잣대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염신부의 이 말은 ‘한국교회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없었다면, 한국교회의 거목인 김대건 신부나 최양업 신부도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다.
“이제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현양사업은 개포동본당차원이 아니라, 교구 나아가 한국교회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여 나갈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염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시복시성보다 먼저 그 분의 삶을, 공적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라며 “개포동본당의 현양사업도 이러한 부문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어떤 분인지 먼저 알고, 그래서 그 분을 좋아하고, 본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 것 같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갔던 길인 서만자에서 마가자까지의 14일간의 여정, 소위 ‘죽음의 행진’이라 불리는 경로를 우선 찾아가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행적을 좀 더 느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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