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살아날 것 두려워 머리와 몸체 따로 매장
1643년 일본 내에서 잠복사목을 하던 최후의 신부 만쇼 코니시(小西行長의 딸 마리아의 아들로 알려짐) 신부가 순교하자, 일본 기리시탄 교회에는 한 사람의 신부도 없게 되었다. 교계제도가 무너지면서 전국 각지의 기리시탄들은 혹독한 박해 속에서 잠복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막부의 엄한 기리시탄 검색도 계속되어 17세기 중반과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잠복 기리시탄 대 검거로 기리시탄 잠복 신앙조직과 공동체가 파괴되는 구즈레(崩れ=붕괴)가 일어났다.
1) 잠복 기리시탄 붕괴
고오리 기리시탄
1657년 오무라(大村)의 고오리(郡) 지방에 잠복 기리시탄 적발사건이 일어났다. 가을, 고오리의 백성 효사쿠(兵作)가 친구에게 “고오리 마을에 신동이 나타나 노파와 더불어 바위굴에서 그리스도 상을 예배하고 신비한 일을 하고 있어 그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모여 신앙하고 있으니 원한다면 함께 가도 좋지만…”이라고 말한 것에서부터 일이 노출되었다.
즉시 관계자들이 체포되고 608명의 잠복 기리시탄들이 감옥에 투옥되었다. 참죄 411명, 종신감옥 20명, 78명은 옥사, 99명은 석방되었다. 참죄 중 131명이 1658년 7월 27일 호코바라(放虎原)에서 처형되었다. 여기서 처형된 순교자들의 머리와 몸체는 각각 다른 곳에 매장되었다. 이는 머리와 몸체가 한 곳에 묻히면 기리시탄의 요술로 이어져 다시 살아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종신 감옥 20인 중 치요는 투옥 당시 11세였는데 1722년 11월 75세로 감옥에서 사망하였고, 치요의 오빠 치마츠는 13세 때 투옥되어 74세에 감옥에서 병사하였으니 각각 64년과 61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우라가미 기리시탄
여러 차례의 잠복 기리시탄 붕괴 사건도 끝난 지 120년이 지난 후,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 나가사키의 우라가미(浦上)에 기리시탄 신앙 자가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4차에 걸친 검색사건이 또 일어났다. 우라가미 1, 2, 3, 4번째 붕괴가 그것이다.
나가사키 북동편에 있는 조용한 산마을 우라가미에는 박해를 피해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자가 많았다. 사건의 발단은 1790년 7월 우라가미의 촌장 다카야(高谷)가 불상 건립을 위해 시사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이 이를 거부하며 촌장과 마찰이 빚어졌다. 이에 촌장은 다다 우에몬(忠右衛門) 등 부유층 19명이 ‘이종(異宗)=기리시탄’을 신앙하고 있다고 소송을 제기하여 포박하였다. 1842년 두 번째 ‘異宗신앙자’ 문제로 도시고로(利五郞)와 다하치(多八) 등이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1856년 세 번째 우라가미 기리시탄 붕괴는 밀고에 의한 것으로 많은 지도적인 인물들이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다. 네 번째는 우라가미 신자들의 공공연한 기리시탄 신앙생활에 대한 명치정권의 탄압이었다.
박양자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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