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너무 늦어버렸을 때, 사실은 그 때가 새로 시작해야할 시점이라는 말, 살면서 더욱 실감하게 되는 진리이다. 때로는 이런 생각마저 든다. 이미 늦어버렸다고, 죽음 밖에는 길이 없다고 낙담하고 있었을 때, 바로 그 절망 속에서 하느님은 이미 또 다른 길을 시작하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라는….
대부분의 성경 저자들은 종말이 곧 임박했다는 의식을 가지고 성경을 저술하고 있었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종말에 대하여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을 제시하였다.
다니 12장은 다니엘서의 마지막 장으로, 지연되는 종말에 대한 각기 다른 숫자들을 언급한다. 다니엘서가 서로 다른 날짜를 그대로 함께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최종 편집자가 중요시 여겼던 것이 종말에 대한 정확한 숫자 제시가 아니라, 그 숫자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늦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이미 다른 구원이 ‘시작’된 것이라는 역설이 모순이 아니라 삶의 희망이고 진리이듯, 종말론적 구원은 ‘늦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성서 묵시문학이 제시하고자 하는 ‘지금, 여기’(hic et nunc)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12장의 내용에 접근해 보기로 하자.
개관
다니 12장은 크게 두 부분은 나뉘어 진다. 첫 부분은 이미 10장에서부터 시작된 ‘천사 담화’에 연결된 부분으로 담화의 결론에 해당되는 12, 1~4이고, 두 번째 부분은 다니엘서 전체의 결어 부분에 해당되는 12, 5~13이다.
내용
10장부터 시작된 고대 근동의 역사 이야기는 안티오쿠스 4세의 최후로 종결된다(12, 1). 이스라엘의 제후 천사(10, 13.21 참조) 미카엘이 승리하게 된 것이다. 그의 승리는 곧 하느님 백성의 승리로 연결되지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되는 것은 아니었다.
구원이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특권임을 12, 1은 분명히 하고 있다. 구원의 구체적 내용은 ‘부활’이다(2절).
땅 속에 묻혀 있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깨어나 보상을 받겠지만, 어떤 이들은 영원한 부끄러움 속에 남아있게 될 것임이 제시되고 있다. 즉 다니엘서는 분명 죽은 이들의 부활을 언표하고 있지만, 이 부활이 모든 이에 해당되는 그런 ‘보편적 부활’은 아님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을 보장받은 이들 중 특별히 부각되어 있는 이들은 ‘지혜로운 자들’, 즉 마스킬림이다. 그들은 마치 ‘하늘의 별들처럼 될 것’임이 묘사되어 있는데(3절), 유다 전승에 의하면 별들은 천상적 존재, 즉 하늘나라의 구성원을 의미하며, 결국 별처럼 된다는 의미는 하늘나라의 구성원으로 격상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혜로운자, 즉 신앙에 충실했던 이들(마스킬림을 중심으로 비폭력적 대응에 섰던 이들)은 고통을 받겠지만, 그 고통을 통해 정련되어 최후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고, 이러한 구원의 속성을 깨달은 이들은 지혜로운 이들로서, 현재의 고난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을 받게 된다는 것이, 이와 다른 모습을 선택한 이들과의 대조를 통해 다신 한번 강조되고 있다.
12장의 마지막은 다니엘 자신의 개인적 부활에 대한 약속으로 되어 있다(13절). 다니엘의 최후는 정확히 마스킬림에게 보장된 약속과 동일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서 저자의 마스킬림 소속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하는 구절이다.
변화되지 않는 것 앞에서
묵시문학과 예언문학이 제시하는 종말론의 가장 궁극적 차이는 ‘세상을 인간의 힘으로 변혁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입장이다.
예언서는 이를 긍정적으로 보지만 묵시문학은 대체로 비관적이다. 세상은 오로지 ‘하느님의 힘’으로만 변혁될 수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의 개혁을 주장하며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카리스마적 지도자라해도 정권을 잡게 되면 이내 민중을 외면하고야 마는 현실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더 이상 인간의 통치에는 기대를 두지 않겠다던 마음이 묵시문학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현실에 상처 입은 마음과, 현실에는 더 이상 기대를 두지 않는 시선이 다소 비관적이고 음성적인 태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묵시주의의 이러한 입장은 그 어느 사조보다도 인간의 한계와 현실을 정확히 직시한, 현실적이고도 진보적인 사조일 수 있었다.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 앞에서 그래도 희망을 갖자는 무기력하고 고루한 호소보다 더 희망적일 수 있는 것은, 내가 변하자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변할 때 삶은 의외로 쉽게 찾아질 수 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