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계 최선봉…한때 무신론자
하느님 체험후 순종하는 삶 살며
그리스도교 신학 철학 연구에 몰두
피로 얼룩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다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우슈비츠 독가스실에서 한 줌 재로 사라진 가르멜회 수녀 에디트 슈타인(1891~ 1942). 교회는 지난 1998년 10월 11일 그녀를 시성했다. 한 때 무신론자로 현대 철학계의 최선봉에 서 있던 그녀가 하느님을 체험한 후 하느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신앙인으로 변모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에디트 슈타인은 1891년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목재상을 하던 유다인 집안에서 막내딸로 출생, 유다교 전통 안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두 살 때 갑작스레 아버지를 잃고, 열한 살 되던 해 숙부마저 죽자 그녀는 유다교 신앙을 과감히 버리고 만다. 유다교 전통에 젖은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해답을 유다교 신앙에서 찾았으나 허사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14살 때 돌연 학업마저 중단한다. 삶의 근원을 파헤치던 에디트에게 학교 교육마저도 해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후 마음을 고쳐먹은 그녀는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브레슬라우 대학교 철학부에 진학해 공부에 전념한다. 당시 독일 사회에서 여자가 철학을 전공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삶의 근원적 문제를 파고들며 참된 진리를 찾고자 몸부림친 그녀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철학 여정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을 경험한다. 당시 독일에서 새로운 철학사조를 형성해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훗설의 저서 ‘논리학 연구’를 접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철학에 대한 새로운 열정에 불타오른 에디트는 그 길로 훗설이 몸담고 있는 괴팅겐 대학을 찾아가 그의 문하생이 됐고, 훗설이 제창한 현상학에 전념하며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간은 왜 사는가’, ‘세상 모든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등 끊임없이 밀려오는 의문의 해답을 유다교 안에서 찾을 수 없었던 그녀는 철학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했고,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선입견 없이 파악하는 훗설의 현상학에 매료됐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동료의 죽음을 접하면서 삶의 의미는 철학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된다. 세계 대전에 참전한 동료 철학자 라이나하의 전사 소식을 접한 그녀는 그의 부인을 위로하고자 찾아갔으나, 부인은 슬픔에 잠기기는커녕 사랑하는 남편이 하느님의 품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디트는 “그 때 나는 내 안에서 불신앙이 무너지고 그리스도가 자리잡는 것을 느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신을 부정하던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존재를 깊이 체험한 그녀는 수년간 투신했던 현상학과 결별하는 동시에 훗설 교수의 조수직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친구 집에 머물게 된다. 여기서 그는 우연히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을 읽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세례를 받았다.
“나는 그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고 다 읽은 후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다’라고.”
이제 그녀의 마음에는 하느님밖에 없었다. 신앙의 참 맛을 본 에디트는 1923년부터 8년간 가톨릭계 학교에서 교사로 지내며 기도하는 사람, 교육자,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그러나 독일이 히틀러 집권 시대로 접어들면서 유다인 교수를 해직하는 등 박해의 칼날을 빼들자 에디트도 교사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하느님께 대한 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서로를 증오하는 그리스도인과 유다인, 또 유다인을 박해하는 독일인들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서로 화해하고 일치하는 방법을 찾던 그녀는 참된 용서는 주님의 십자가밖에 없다고 확신,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해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수녀로 다시 태어났다. 그 후 그녀는 학문적 재능을 살려 십자가의 성 요한, 성녀 데레사 등 교회 사상가의 영성, 그리스도교 신학과 철학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며 수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하지만 독일의 반(反)유다인 정책이 거세지면서 그녀는 결국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돼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나는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죽음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뜻에 순종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또 유다인들의 불신앙의 보속으로 나 자신을 바칩니다.” 그녀는 유다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보속으로, 나아가 유다인과 그리스도인들의 화해를 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 것이다.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는 한마디로 ‘진리에 대한 철저한 헌신’으로 일관했다고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진리에 목말라했던 그는 세속적 학문, 철학에서 삶의 궁극적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그가 찾아 헤매던 진리의 본질은 없었다. 진리는 오히려 그녀가 부인했던 신앙 속에 있었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체험한 후 자신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진리를 깨달은 이상 그녀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온 몸과 영혼을 하느님께 내맡기는 결단과 실천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에디트의 삶이자 영성이다.
유다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부당하게 내몰리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녀는 이에 반항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모든 고통을 하느님의 손길이자 사랑이며 섭리로 받아들였다. 세속적 가치와 욕망은 물론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내 속에서 비워내고 죽음마저 사랑으로 수용한 삶이 바로 에디트 슈타인의 영성이자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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