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책 한권에 첫 발자국 찍다
‘눈을 맞으며 길을 다니네 / 얼굴을 스치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촉감 / 동생과 함께 눈을 맞으며 소곤소곤 속삭이다가 / 뒤를 돌아보면 눈 길 위에 이어진 휠체어 바퀴 자국 / 나의 발자국은 언제쯤이나 생길 수 있을까?’(‘다니엘의 일기’ 수록 시 ‘눈길’).
태어나서 한번도 ‘나의 발자국’을 눈밭에 새기지 못한 뇌성마비 청년. 눈밭은 아니지만 소박한 책 한 권에 난생 처음 발자국을 찍었다.
#서른 둘
보통 사람이라면 직장을 갖고 가정을 꾸리는 행복에 살아갈 나이. 하지만 이병훈(다니엘)씨는 서른 두해 동안 일어서기는커녕 한번 앉아 보지도 못하고 누워 지내야 했다. 이병훈이라는 이름 석 자, 그리고 다니엘이라는 세례명 보다 항상 앞서 붙는 수식어 뇌성마비는 병훈씨의 자리를 어느 누구보다 낮게 만들었다.
울지도 못하고 엄마 젖도 빨지 못하는 신생아.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늦으려니’ 생각했던 부모였다. 하지만 네 살이 되던 해 뇌성마비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어떻게든 병을 고쳐 보려 노력했다. 기도회가 열리는 곳은 전국 어디든 찾았다. 소용없었다. 몸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뻣뻣해져 갔다. 학교도 갈 수 없었다. 또래 아이들이 학교 가자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어머니 안희자(베로니카)씨와 병훈씨는 하루 종일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에게 빛이 된 사람들
1986년 병훈씨는 다니엘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너무 기쁘고 좋았다. 집만이 아닌 다른 곳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성당에 나가는 것이 즐거웠다. 이 시기 인연을 맺은 곳은 집 근처 전진상복지관. 봉사자가 집을 찾아 이야기를 나눠줬고, 병훈씨나 가족이 아플 때면 약도 지어줬다.
이후 복지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항상 친할아버지 같은 추기경님, 처음으로 한글을 가르쳐 준 라자로 형, 평생 옆에서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던 막달레나 누나, 시를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한마음 독서회, 그리고 난생 처음 두근거리는 마음을 느꼈던 세살 위 누나까지….
자신의 삶이 절망과 좌절로만 채워져 있지 않음을 알았다. 잠깐이라도 만난 사람들이 ‘도움을 받고 간다’라고 말할 때마다 자신의 병은 다른 이들이 결코 누릴 수 없는 몇 배 큰 사랑과 관심을 받게 해 준 행복의 원천이었음을 병훈씨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깨달음은 서른 두해 만에 한권의 책으로 세상을 만났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글을 읽고 쓰도록 도움을 준,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이 자신의 몸 속에 온전히 살아있음을 알려 준 많은 사람들을 위한 감사와 보답이 담겼다.
#낮은 곳에서 바라보기
‘다니엘의 일기’(조인/121쪽/7000원)는 병훈씨의 자서전이다. 96년부터 10년 가까이 병훈씨에게 국어와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안명자(아가다)씨가 병훈씨의 이야기를 받아 적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짧은 이야기에도 얼굴을 수십 번 움직이며 힘겹게 말을 토해내는 그와의 대화는 끊어지기 일쑤. 한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3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책에는 병훈씨가 98년부터 쓴 자작시 70편 중 22편도 실려 있다.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하며 바라봤던 자연과 이웃들, 그리고 장애의 아픔을 한편의 시로 승화시킨 담담한 고뇌가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신 모든 분들께 제가 살아있는 날까지 기도하는 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요, 또 이것이 제 생의 목표이기 때문이니까요’(‘다니엘의 일기’ 중 ‘고마운 분들을 위한 기도’에서).
기사입력일 : 200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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