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아파하신다’
[본문]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는 인간을 향한 연민 때문이다. 그렇다. 그분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기 전에, 아니 강생하시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고통을 몸소 끈질기게 겪으셨다. 만일 그분이 이렇게 (강생) 이전에 고통 받지 않으셨더라면, 우리 인간의 삶을 함께 나누기 위해 사람이 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그분은 먼저 고통을 받으셨다. 바로 그래서 이 땅에 내려 오셔서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 겪으신 이 고통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고통이란 말인가? 그것은 사랑의 고통이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우주의 하느님이신 아버지께서도, 용서와 자비가 충만한 하느님이시므로, 어떤 방식으로인가 고통 받으신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사연들에 함께 하고 계시는 그분 역시 인간의 고통을 맛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대 알아듣겠는가? 사실 주님이신 네 하느님께서는 마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껴안듯이 너를 있는 그대로 껴안으신다. 아드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껴안으시듯이, 아버지께서도 우리 존재를 그렇게 껴안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께 (고통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한다면, 그분은 마음이 울렁이시고 애틋함으로 마음이 미어지신다. 사랑으로 마음이 아파 오신다. 그러하기에, 원래 하느님 본성의 위대함으로 보자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짐짓 들어오셔서, 사람의 고통을 당신 품에 껴안고 아파하시는 것이다.
오리게네스의 ‘에제키엘서 강론’ VI, 6
“함께 고통 받으시며 구원하셨다”
[해설]
그리스 철학의 신관념에 따르면, 그 자체로 완전하신 하느님은 그 어떤 결핍도 없으므로 고통을 겪으신다는 말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해야 한다. 그런데 교부 오리게네스(+254)는 그토록 그리스 철학의 혜택을 많이 입었음에도 대담무쌍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하느님도 고통받으신다”는 것이다.
사랑의 고통이다
오리게네스가 말하듯, “그것은 사랑의 고통이다.” 사랑하면 고통 받게 마련이다. 고통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알면’(智) 필연적으로 앓게(痛) 되어있다. 성서에서 ‘안다’는 말은 실상 관계 맺는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그러하고, 사람과 말 못하는 짐승 사이도 사실 그러하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도 이치가 같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에 예수님의 한 평생은 고통 받는 뭇 인생을 향한 연민의 연속이었다. 복음서 곳곳에서, 그분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가실 때마다 지극한 측은지심에 사로잡히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했던가. 고통 받는 사람의 몸과 딴 몸이 아니기에, 사람의 고통은 곧바로 그분의 고통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연민의 고통은 십자가의 수난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런데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그렇게 연민의 노정을 걸으셨다는 사실에서 강생 이전의 영원한 말씀 시절부터 동일한 사랑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연역해 낸다. “만일 그분이 이렇게 (강생) 이전에 고통 받지 않으셨더라면, 우리 인간의 삶을 함께 나누기 위해 사람이 되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부전자전이다
그리고, 역시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부전자전이다. 요새 말로 ‘붕어빵’이다.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시다면 그것은 아버지 하느님을 쏙 빼닮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의 마음 역시 늘 형언할 수 없는 연민으로 울렁이는 측은지심의 심연이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우리가 그분께 고통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한다면, 그분은 마음이 울렁이시고 애틋함으로 마음이 미어지신다. 사랑으로 마음이 아파 오신다”라고 말한다.
렘브란트의 유명한 ‘돌아온 탕자’ 그림을 보면, 뉘우치고 돌아와 무릎을 꿇고 아버지께 매달린 아들을 껴안고 있는 늙은 아버지의 눈자위는 그간 흘린 눈물로 짓물러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전해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은 그런 모습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던 오리게네스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느님도 고통 받으신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료 인간의 고통 앞에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인간 같잖은 것”이란 말을 들어 싸다면, 제 속으로 나온 자식인 사람의 고통 앞에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하느님 역시 “하느님 같잖은 것”이라 해야 하지 않나.
CEO도 아니시다
맑시스트 경제학자였다가 후에 그리스도교 신학자가 된 세르게이 불가코프가 “십자가에서 삼위일체 모두가 처형당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고통 받을 수 없는 하느님, 전능하고 강력하고 크기만 한 하느님의 모습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하느님일 수 있을망정 그리스도인의 하느님은 될 수 없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쾌걸 조로나 슈퍼맨처럼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보란 듯이 등장해서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 해결사가 아니시다. 그분은 알렉산드로스 같은 개선장군도 빌 게이츠 같은 수완 좋은 CEO도 아니시다. 그런 것들은 죄다 사람이 자기 모상으로 창조한 신이다.
십자가 앞에서만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는 빛을 얻는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고통당하는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시는 하느님으로 드러나신다. 그렇다. 그분은 한 평생 적지 않은 말씀과 행적을 남기셨지만, 그것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마지막 사흘간 무력하고 어리석게 ‘겪은’ 것(수난, passio)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 고통의 최심부(最深部)에 들어오셔서 거기 끝까지 못박혀 계심으로써만 우리를 구원할 수 있으셨다.
“하느님도 때로는 외로움을 타신다”(정호승)는 말은 시인의 노래로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도 아픔을 겪으신다”는 오리게네스의 말은 시 이상의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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