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님, 총은 이렇게 쏘는겁니다”
옅은 안개, 세상을 파스텔톤으로 바꾸며 푸근하게 감싸는 힘을 지닌 그 마저도 이곳에선 경계의 대상이다.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대상이 던져주는 두려움은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휴전선 비무장지대, 똑같은 하늘 아래지만 이곳을 딛고 선 병사들은 늘 긴장 속에 하루하루를 난다.
11월 25일. 155마일 휴전선의 한가운데 자리한 육군 제28사단 태풍부대 전방 GOP소초 장병들은 뜻밖의 방문을 받았다. 스러질지 모르는 안개 속 군사분계선을 끼고 마음을 졸이고 있던 중부전선 최북단 지킴이들을 찾은 이는 다름 아닌 이한택 주교를 비롯한 14명의 의정부교구 사제단.
이날 오전 연천성당에 집결한 의정부교구 사제단이 안내된 곳은 지난 6월 최전방 GP총기난사 사고가 일어났던 바로 그 부대. 쓰라린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장병들에게 다가서길 먼저 자청하고 나선 건 사제들이었다. 심리적으로 위축된 가운데 아픔을 눅이며 남모를 눈물을 흘릴지도 모를 사병들의 아픔에 조금이나마 함께 하자는 뜻에서였다.
부대 창설 후 처음으로 성직자들을 맞은 GOP소초 막사에는 생경한 분위기가 흐르기도 했다. 뜻하지 않은 민간인의 방문으로 어색함이 돌던 병사들 사이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여러분들을 통해 이 땅의 미래가 어둡지 않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남성에게 군 생활은 나를 뛰어넘어 국가와 민족, 겨레와 가족을 생각하게 하는 훈련기간입니다.”
50년 전 체험한 군 생활을 바탕으로 한 이주교의 따뜻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썰렁하던 내무반은 이내 화기애애함이 감돌았다.
김진원(바오로) 일병은 “시련을 통해 오히려 내면적 성숙을 더할 수 있다는 생각”이라며 “국민들이 군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가져주는 만큼 군인들은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낮과 밤이 뒤바뀌는 전방, 밤이 찾아들자 비무장지대 철책선은 이미 칼바람이 맹위를 떨치는 겨울 속으로 성큼 들어선 듯했다. 사제들은 9개의 GOP소초로 나뉘어 병사들과 함께 경계근무를 서며 본격적인 일일 병영체험에 들어갔다. 잠시도 전방에서 눈을 떼기 힘든 긴장감을 느끼는 가운데서도 사제들은 어둠 속에서 병사들의 손을 잡으며 미소를 보냈다.
준비해간 위문품을 병사들에게 전하며 불빛이라곤 찾기 힘든 북녘땅을 향해 선 사제들은 이 땅에서부터 화해와 일치의 정신이 넘쳐흘러가길 간절히 기원하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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