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범죄예방에 효과없다”
유럽위원회·미국법조협회·일본변호사연합회 주최
사형대체 형벌, 재판, 변호사 역할 등 다각적 논의
【일본 도쿄 서상덕 기자】
12월 6∼7일 일본변호사연합회 회관에서 열린 ‘인권과 사형을 생각하는 국제 리더십 회의’는 21세기 인류가 함께 개척해나가야 할 새로운 인권의 지평을 돌아보게 한 의미있는 자리였다.
유럽위원회(EC)와 미국법조협회(ABA), 일본변호사연합회(JFBA) 등 3개 단체가 공동개최한 이번 국제 행사에는 EU를 비롯해 북미와 아시아 지역의 20개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권운동 관계자들은 물론 정부 요인과 저명한 비정부기구 활동가들이 대거 참여해 사형제도를 둘러싼 국제적 흐름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를 펼쳤다.
이번 회의에서는 국제인권법 차원에서 본 사형의 자리매김, 사형을 폐지하거나 집행을 정지하고 있는 국가에서의 사형대체 형벌의 운용, 사형과 재판의 문제, 범죄피해자와 사형의 문제, 사형문제에 관한 변호사의 역할 등 사형문제를 둘러싼 다각적인 논의가 이뤄져 다른 대륙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형제도 존치 비율이 높은 아시아지역 국가로서 한국과 한국 교회의 몫을 새롭게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주일 영국대사관의 후원 아래 열린 행사기간 동안 각국 대표들은 국제적 차원에서 인권의 지평을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전략과 세부 프로그램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펼침으로써 인권 문제를 둘러싼 국제적 연대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확인하는 성과를 내오기도 했다.
특히 프랑스에 본부를 둔 국제적 인권단체 ‘사형제반대동반자’(ECPM) 의장이자 세계사형폐지연맹 회장인 미셸 토브(Michel Taube)씨를 비롯, 미국법조협회 마이클 그레코(Michael Greco) 회장, 독일 니더작센 범죄학연구소 크리스천 파이퍼(Christian Pfeiffer.전 니더작센주 법무장관) 소장,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학 사형연구센터 피터 호지킨슨(Peter Hodgkinson) 소장, 일본변호사연합회 사형집행정지실현위원회 야스다 요시히로(Yasuda Yoshihiro) 변호사 등 각 대륙과 나라에서 사형폐지운동에 선구적 역할을 하고 있는 인권운동가들이 참여함으로써 논의의 깊이를 더했다. 또한 사형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여러 나라에서 사형제를 종식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제출돼 눈길을 모았다.
일반시민들에게 공개된 가운데 열린 첫날 회의에서 크리스천 파이퍼 소장은 ‘사형과 피해자’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언론에 범죄가 많이 보도될수록 일반인들은 범죄가 증가한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며 “언론인과 미디어를 활용해 건전한 여론을 조성함으로써 과잉보도로 인한 문제점을 줄일 수 있으며 사형제 폐지에 긍정적인 여론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피터 호지킨슨 소장은 “사회에서 범죄피해자(가족)에 대한 지원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느냐에 따라 사형제에 대한 여론이 좌우될 수 있다”며 “범죄피해자에 대한 무관심과 유가족에 대한 방임이 사형제도 존치론과 연결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사형폐지운동이 진전하기 위해서는 범죄피해자에 대한 지원시스템 구축에 보다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미국 ‘양형 프로젝트’ 마크 모어 부소장은 ‘사형을 대체하는 형벌’을 주제로 한 발표에서 “현재 미국에는 10만명당 700명이 구금상태에 처해 있어 30년 전에 비하면 6배에 이른다”고 밝히고 “흑인으로 태어나면 생애에 한번은 구금되는 게 현실”이라며 사형제도가 범죄 예방에 효과가 없음을 강조했다. 나아가 “종신형의 경우 사회 복귀의 희망을 빼앗음으로써 구금자들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준다는 면에서 비인도적”이라며 종신형제도에 대한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이에 한국측 대표로 참석한 박병식(유스티노) 교수는 “사형을 대체하는 형벌의 경우 각 지역과 나라의 문화, 관습, 현실 등 그 사회가 지닌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하고 “종신형제도, 모라토리엄(사형집행 유예) 등 사회 현실을 반영한 다양한 운동 방안에 대한 연구와 모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전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 윌리엄 세션즈씨는 기조강연 등을 통해 “적절하고 공평한 방식으로 다른 나라의 사례에서 서로 배워야 한다”고 밝히면서 DNA 감정을 통한 접근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미국에서 DNA 감정이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1988년 10월 이후 현재도 피고인의 25%가 실제 범죄자의 DNA와 불일치하는 게 현실”이라며 “DNA 감정이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여론과 상황을 호전시키고 있음에도 검찰과 경찰은 이 방법에 소극적이거나 저항하고 있다”고 밝혔다.
각국 변호사를 비롯해 로스쿨 관계자 등 법률전문가 중심이 돼 열린 둘째 날 회의에서는 △사형에 대한 국제기준 △사형과 오판 △사형집행 정지와 변호사의 역할 등을 주제로 전문가의 역할을 되새길 수 있는 다양한 의견들이 제출됐다.
이날 회의에서는 각국의 재판 과정에서 인권 관련 국제법·규약들이 적용되고 있는 현실이 소개돼 관심을 모았다.
미국 샌드라 밥콕 변호사는 “많은 경우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 재판정에서조차 인권 관련 국제법과 규약들이 적용되기는커녕 거론되지도 못하는 상황이다”고 지적하고 “로스쿨 등에 인권 관련 국제법과 규약을 습득할 수 있는 과정을 마련해 보편적 인권에 대한 인식을 높여 나갈 필요성이 있다”고 밝혔다.
주일 유럽위원회 미하엘 라이터러 부대표도 “로스쿨 등에서 국제 인권법을 교육함으로써 재판 실무자들 사이에서 사형제도에 대한 여론을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참석자들은 회의를 마무리하며 향후 지속적인 국가간 연대와 국제네트워크의 필요성에 공감대를 마련하고 차기 대회에서는 각국의 성공사례를 나누기로 했다.
■“범죄피해자 가족에 따뜻한 사랑전해야”
범죄피해자 가족 로버트 미라폴씨
부모, 국가기밀 넘긴 누명 쓰고 사형 당해
고인 이름 펀드 만들어 사형폐지운동 펼쳐
일본에서 열린 이번 국제 회의에는 사형제도의 비인간성과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가 함께하고 있었다. 바로 20세기 미국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인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 죽어간 로젠버그 부부의 남겨진 아들 로버트 미라폴(Robert Meerapol.58)씨가 그다.
미라폴씨는 뉴욕에서 평범한 전기기술자로 일하던 아버지 로젠버그와 어머니 에셀을 소련에 핵기밀을 넘긴 공모자라는 누명으로 전기의자에서 떠나보내야만 했다. 그의 나이 여섯살 때의 일이다. 그들이 처형된 지 40년 후인 1993년 미국 변호사협회는 모의재판을 통해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너희는 아빠와 엄마는 죄가 없으며,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속일 수 없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미라폴씨는 그의 부모가 자신에게 남긴 이 마지막 편지내용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살아왔음을 고백했다.
“사형제도가 좋은 것이라면 어떻게 지금 상황을 더 인간적이고 나은 모습으로 호전시킬 수 없겠습니까?”
가슴에 씻기 어려운 아픔을 품어온 그는 의외로 담담한 모습으로 사형제도의 문제점을 짚어나갔다. 변호사이기도 한 그는 오랜 동안 부모의 사형을 있게 한 이들에 대한 복수심을 지녀왔음을 솔직히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새롭게 일으켜 세운 것도 큰 아픔이 싹틔운 더 큰 사랑이었다.
“어렸을 때의 경험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지 않았다면 저는 고통 속에 오늘을 맞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부모를 잃고 어려움에 처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부모의 이름을 따 ‘로젠버그 펀드’를 만든 배경에도 이런 경험과 깨달음이 큰 몫을 했다. 매년 수백명의 어린이들에게 각종 교육비와 생활비 등을 지원하고 있는 로젠버그 펀드의 회원 전원이 사형제도 폐지를 적극 지지하고 있는 것도 그의 정신이 바탕이 됐다.
미라폴씨는 사형폐지운동을 펼침에 있어 범죄피해자와 사형피해자 가족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범죄피해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고립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2단계의 과정을 제안한다.
“먼저 범죄피해자가족들에게 다가가 이들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활동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단계로 이렇게 조직된 피해자가족들이 사형집행자의 가족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밑거름으로 로젠버그 펀드는 ‘No Silence No Shame(침묵하지 말자 부끄러워하지 말자)’ 캠페인을 전개해오고 있다. 범죄로 피해를 입은 가족들이 침묵과 소외를 깨는 것을 사형제도 폐지의 첫 걸음으로 삼자는 뜻에서다.
“현재 미국에는 3400여명의 사형수들이 있습니다. 이들로 인해 아무 죄 없이 고통 속에 있을 어린이들의 수가 몇 명인지는 모릅니다.”
자신의 아픔을 보다 큰 사랑으로 승화시켜낸 미라폴씨의 삶은 사형제도와 범죄피해자 문제와 관련해 여전히 좁은 시야에 매달려 있는 우리 사회에 일침을 놓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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