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를 넘어선 위대한 거장”
‘피에타’ ‘최후의 심판’ ‘노예들’ … 예술적 업적과 신앙적 영감 뛰어나
이탈리아의 조각가, 건축가이자 화가인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Michelangel 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라는 긴 이름 중에서 우리가 흔히 그를 칭하는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은 그의 성이 아니라 이름이다.
흔히 위대한 역사적인 인물들이 성으로 통용되는데 반해 그는 예외적으로 이름으로 부른다. 예수라는 이름이 당시에 아주 흔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가 예수라 부름은 그분이 인류 역사에 남긴 그 엄청난 업적과 위대함에 기인한다.
예수라는 이름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미켈란젤로라는 이름 역시 당대에 많은 동명이인이 있었을터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후대에 의해 미켈란젤로라고 불리는 이는 오직 한 사람,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뿐임은 역사가 그에게 주는 찬사라고 할 수 있다.
1475년에 태어나 1564년 90세로 천세를 모두 누리고 간 그는 그 위대한 예술적 업적과 신앙적 영감으로 인해 500여년이 훌쩍 넘는 오늘날까지도 세기를 넘어선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이 어린 14세 때 그를 문하에 둔 스승 베르토르도 디 조반니는 미켈란젤로의 놀라운 재능을 발견하고 그에게 물었다. “조각가가 되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이에 대해 그는 “재능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스승은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며 어린 미켈란젤로를 이끌고 술집으로 향했다. 술집 앞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나신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 다음에 그는 어린 제자를 성당으로 인도해 아름다운 성모상 앞에 세웠다.
스승은 제자에게 물었다. “너는 어떤 조각가가 되고 싶으냐?” “저는 하느님을 위해 저의 조각적 재능과 열정을 사용하겠습니다.” 스승은 세 번을 거푸 다짐하듯 물었고 제자는 서약하듯 똑같이 대답했다.
많은 예술가들의 일터였던 피렌체 근방의 카프레세라는 곳에서 태어난 미켈란젤로의 집안은 귀족 집안이기는 했으나 부와 권력을 풍요롭게 누릴 정도의 가문은 아니었다. 부모의 희망과는 달리 어린 미켈란젤로는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고, 13세가 되던 해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했던 화가 기를란다이오의 공방에 맡겨져 공식적인 그림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천부적 재능은 이곳에서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음을 깨닫게 했다.
미켈란젤로가 장난기로 제자들의 교육용으로 쓰던 스케치 샘플 중 한 점을 빼내 자신이 그린 그림과 바꿔치기한 뒤, 스승은 이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고, 그는 이런 스승 밑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며 공방을 빠져나왔다.
미켈란젤로에게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바로 이때, 피렌체의 통치자인 메디치 가문의 눈에 띈 것이다. 유력자 중 한 명인 로렌초라는 이의 눈에 들었던 미켈란젤로는 그의 집에서 숙식하며, 메디치가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1494년 볼로냐로 가서 성 도미니코의 묘소에 쓰일 작은 조상들을 조각하면서 명성을 얻었고, 1498년에는 그가 남긴 걸작 중 하나로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 놓일 ‘피에타’상을 조각했다. 이로써 더욱 확고한 명성을 얻은 그는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1504년에 피렌체 대성전을 위한 다윗상을 완성했다.
교황 율리오 2세의 주문으로 1508년부터 4년에 걸쳐 완성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는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보이는, 천지창조부터 술에 취한 노아까지 수백명의 인물들을 담은 대작이다. 천장화를 완성한 뒤 미켈란젤로는 곧바로 교황 율리오 2세의 묘소 작업에 착수해 ‘노예들’과 ‘모세’를 조각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중에 아름답지 않고 의미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중에서도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은 당시의 개념을 뛰어넘어 새로운 형태와 개념의 예술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 속에는 신성해야 할 성인들이 모두 벗은 채 등장하고, 천사들은 날개도 없을뿐더러 아름답지도 않은 얼굴로 묘사된다.
그의 위대함은 작품들이 갖고 있는 예술적 아름다움에 당연히 기인하지만, 그가 평생 동안 잃지 않았던 자유분방한 사고와 작품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결코 어떤 권력이나 물질욕에도 매어있지 않았으며 오로지 자신의 예술적 열정과 자부심으로 작품 제작에만 몰입했다.
비록 메디치가와 교황으로부터 끊임없이 충성을 요청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부심과 자유, 열정은 참으로 자유로운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게 했다. 기라성 같은 후원자들이 그의 뒤에 있었으나 그는 어느 누구 앞에서도 당당했다.
그의 작품에 토를 달거나 기분을 언짢게 한 이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예컨대, 한 추기경이 ‘최후의 만찬’ 작업장에 나타나 벌거벗은 성인들에 대해 한 마디 하자, 그는 그 추기경을 지옥의 사신 미노스로 그려 평생 지옥에 가뒀다.
또 교황 율리오 2세가 바쁘다는 이유로 자신을 만나지 않자, 그는 즉시 교황이 나를 찾으면 없다고 하라며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돌아갔다. 당혹스러워진 교황이 그를 다시 로마로 부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는 일화는 어떤 권력 앞에서도 당당했던 그의 자존심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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