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에 죽음의 그림자 드리워도 “감사”
【파키스탄 잠무 카슈미르 이승환 기자】 히말라야에서 내려오는 길은 추웠다. 마음이 추웠다.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를 담요 한 장으로 막아내면서도 이방인에게 웃음을 보이던 그들. ‘인샬라(신의 뜻대로)’ 한 마디로 재앙을 신의 심판으로 감내하는 사람들을 떠올리자 가슴이 시렸다. 대지진이 일어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땅을 갈라놓고 미래를 책임질 한 세대를 송두리째 빼앗고도 재앙은 성이 차지 않은 듯 했다.
해발 3000m 싱골라(SINGOLA) 마을은 밤이면 기온이 영하 20도까지 내려간다. 사막용 텐트가 주민들의 피난처다. 가족과 집을 잃고 이제는 추위라는 또 하나의 재앙에 내몰린 이재민들을 카슈미르 히말라야 산악지역의 겨울 한 가운데서 만났다. 본지는 12월 7일부터 15일까지 텐트·매트리스 배분현황 참관과 중·장기 구호사업 논의 차 파키스탄에 파견된 한마음한몸운동본부 국제협력팀과 동행, 현지의 모습을 보도한다.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차로 달린 지 두 시간여. 파키스탄과 자유 잠무카슈미르(AZAD JAMMU & KASHMIR, 이하 AJK) 경계선에 도착했다. AJK는 영토분쟁 중인 파키스탄과 인도관할 카슈미르 사이 완충지역. 파키스탄 정부의 간접 영향을 받지만 대통령을 독자적으로 선출하는 등 자치국가의 성격을 갖고 있는 곳이다.
폭격 맞은 듯 무너진 집들
진앙지와 가까운 이 곳 주민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언론과 국제구호단체들의 공격을 받았다 할 정도로 관심이 쏠린 발라코트 등 파키스탄 내 다른 도시들에 비해 이 지역은 아직 구호작업이 더딘 상태다. 주민 대부분이 해발 2000m 이상 산악지역에 흩어져 있는 데다 지진 후 길이 끊겨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보다 강한 이슬람 색채를 띠는 것도 해외 단체의 접근을 막았다.
AJK에 들어서자 지진의 참상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폭격을 맞은 듯 무너진 건물과 잔해, 지붕만 떼어 땅에 올려놓은 것처럼 주저앉은 집들, 언덕 위에서 떨어진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파노라마 화면처럼 스쳐갔다. 건물 잔해에 걸터앉은 아이는 초점 잃은 눈동자로 낯선 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추위에 지친 모습이었다. 때가 낀 맨발에 담요 한 장. 이곳에 닥친 겨울 위기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전기도 물도 끊겨
바그(BAGH)지역 코트리 켈리(KOTLI KERI) 마을. 이 마을 하미둘라(Aziz Hamidulla)씨는 운이 좋은 편이다. 집은 완전히 무너졌지만 다섯 가족 모두가 급히 대피해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무너진 집 앞에 텐트를 치고 생활한 지 벌써 한 달 반째. 전기도 안 들어올때가 많고 물도 끊기기 일쑤다.
딸이 감기에 걸렸지만 약을 구할 수 없다. 병원은 마을에서 20km나 떨어져 있다. 이곳에서 주민 17명이 죽고 33명이 다쳤다. 마을 입구 묘지에는 봉분한지 얼마 안 된 무덤이 여럿 보였다.
낮은 계급탓 국가 지원 없어
지진은 빈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피해를 안겼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이 겪는 아픔은 더 크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 텐트 20여동이 전달된 라왈라콧(RAWALAKOT) 베르몽(BERMONG) 마을이 그렇다. 마을 주민들은 카스트제도와 비슷한 인습이 아직 존재하는 파키스탄에서 최하위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지진으로 없던 살림마저 모두 땅에 묻어야 했다.
계급이 낮은 탓에 이웃 주민들이나 파키스탄 단체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
사회가 버렸던 이들은 지난 10월 자연에게 버림받았고 이제 더 이상 버림받을 곳도 없다.
며칠 전 도착한 텐트 덕분에 그나마 밤 이슬을 피할 곳이 생겼다는 것이 현재 그들의 유일한 위안거리다.
텐트 부족해 남자는 밖에서
날이 저물자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저녁 9시가 넘어서야 도착한 해발 3000m 고지 하지라(HAJIRA) 지역 아코르반(AKHORBAN) 마을. 도로 바로 옆에 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전달한 텐트 열 개가 줄지어 들어서 있다.
텐트 안을 보자 한숨부터 나왔다. 어린 아이들이 담요 한 장에 의지해 떨고 있었다. 얼마나 추운지 텐트 안에서도 입김이 나왔다. 난로도 물론 없었다. 아이들과 여자들은 나은 편. 텐트가 부족해 남자들은 밖에서 자야한다.
주민들은 “텐트가 없을 때는 온 가족이 집 밖에서 나무 합판으로 바람을 막고 잠을 잤다”며 아이들이라도 추위를 피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한국 신자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3000여 채의 가옥이 완파되는 피해를 입은 하지라에 텐트가 도착한 것은 불과 일주일 전. 그러나 겨울은 이제부터다. 이곳에는 앞으로 1m 이상의 폭설이 내릴 것이고 영하 10도 이하의 추위가 3월까지 계속될 것이다.
숙소에 도착했지만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침낭 없이는 버티지 못할 방 안의 한기 탓도 있지만, 오후에 만난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텐트는 이곳보다 훨씬 더 추울 것이다. 겨울 파키스탄의 밤이 깊어간다(계속).
◎“이재민에게 사랑을”
전 세계 텐트가 다 모여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텐트가 파키스탄 이재민들에게 보내지고 있다. 하지만 텐트만으로는 300여만명에 달하는 이재민들이 겨울을 보내기 역부족이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눈까지 내린 산악지대에는 벌써 저 체온증 환자와 동사자가 나오고 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지만 국제사회의 지원은 갈수록 줄고 있다. 해외 각국은 약속한 구호금을 제때 전달하지 못하고 있고, 구호인력도 지진 발생 직후인 10월에 비해 인원이 많이 줄었다.
지원금과 텐트·매트리스 전달 등 1단계 긴급구호사업을 마친 한마음한몸운동본부는 이러한 상황에 발맞춰 AJK 등 추위가 심하면서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산악지역에서 중·장기 구호사업을 전개할 계획이다.
본부 국제협력부 김대민 과장은 “현재 가장 급한 일은 이재민들이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도록 쉘터(임시거처) 또는 영구 주택을 짓는 것”이라며 “텐트와 매트리스 마련을 위해 성원을 보내주셨던 것처럼 향후 본부가 전개하는 중·장기 구호사업에도 신자들의 관심과 물질적 후원이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 도움주실 분 우리은행 454-005324-13-045 한마음한몸운동본부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