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존재 받아들이도록
나를 비워야 ‘참 평화’ 가능
사막의 밤은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사막의 밤하늘에 쏟아지는 수많은 별은 내 마음을 꿰뚫어보고, 내 지난 삶을 돌아보고, 내 미래를 밝히는 맑은 눈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사막은 수많은 생명이 숨쉬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며, 자신의 텅 빔을 통해 생명이 살아가게 하는 곳이다. 사막은 이 텅 빔과 밤의 눈을 통해 생명으로 하여금 자신이 되면서 동시에 자신을 넘어서게 만든다. 그래서 사막의 밤은 참으로 평화로운 곳이다. 그 밤에 인간의 역사에서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의 하느님이심을 드러내고, 그의 사랑을 받는 이들의 평화를 위해.
평화는 생명의 은총이며,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가장 큰 이유이며,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하느님의 가장 큰 선물이다. 그래서 평화를 가꾸는 일은 인간이 지닌 피할 수 없는 소명이다. 평화를 바란다면 내 행동과 생각을 바꾸어야한다. 평화를 원한다면 나를 버려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은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비우셨다. 그런데 지금 이 땅은 평화로운가.
겉보기에는 그렇다. 전쟁이 없기에, 일상의 폭력을 겪지 않기에 평화로운 것 같다. 지난 날의 가난함도 굶주림도 없기에, 세계 10대 무역국이며 먹을 것 입을 것 별로 부족하지 않기에 현실에 만족하며, 그래서 참 평화로운 세상을 사는 듯하다.
그런데 조금만 돌아보면 이 땅에는 너무도 많은 폭력이 춤추고 있지 않은가. 나라 밖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이들이 굶주리고, 최소한의 의약품이 없어서 또는 피할 수도 있었을 전쟁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그걸 보지 않기에 평화로운 듯하다.
우리 주위만 돌아보아도 평화를 해치는 폭력이 현란하게 제 모습을 바꾸어 가면서 나타나고 있다. 생명을 과학이란 이름의 지식과 그에 따른 몇 가지 기술로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고 믿는 폭력. 교회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이해만 좇는 이들이 저지르는 폭력. 진실을 말하는 자를 핍박하고 국익과 국가를 말하면서 이를 덮어버리는 폭력. 모든 학문이 자본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외치는 반지성주의. 시장경제란 허상으로 모든 삶을 자본 산출에 줄 세우는 물신의 폭력. 시인과 정치가가, 경제인과 학자가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믿는 전체주의적 폭력. 온갖 부정과 비리로 돈을 주고받은 자는 경제란 이름으로 면죄부를 받고, 그 잘못을 외친 사람은 기소되는 폭력. 비정규직에게 저지르는 폭력. 학력과 성별, 핏줄이 다른 이들에게 퍼붓는 폭력. 국익이란 이름으로 불의한 전쟁에 참가하는 폭력. 자신이 가진 것을 더 지키기 위해 온갖 학문과 정의와 성스러움을 팔아먹는 이들의 폭력.…
폭력이 넘치는 이곳에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해야 할 교회, 평화를 말해야 할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구조적 모순과 체제의 한계를 성찰하지 않고, 미래를 꿈꾸지 않는 우리는 누구인가. 한나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폭력이 시작된다”고 했다.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버리지 않는 곳에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을 넘어 진정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비천하게 자신을 낮추일 때까지 낮추신 예수님의 평화를 말하려면, 자신의 존재까지 비워야만 한다. 존재의 변화 없이 평화는 있을 수 없다. 존재의 텅 빈 자리에 생명의 마음과 생명의 영성을 대신 채워야 한다.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그렇게 나를 바꾸어야 한다. 타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를 비워야 한다. 그것이 자신을 비우신 하느님의 평화 만들기이다. 평화를 원한다면 삶과 세계, 생명과 역사를 성찰함으로써 존재를 바꾸어야 한다. 존재의 변화 없이 평화란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평화란 언제나 생명의 존재론적 평화이다. 하느님이 하느님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 하늘 높은 곳의 영광이며, 인간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이 이 땅의 평화이기 때문이다.
신승환 (가톨릭대학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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