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지레 기겁을 하고 거절했을 것이다. 처음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3년을 쓰게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말이다. 미리 계산하고, 여파를 생각하고, 별거 아닌거 가지고도 머리 터지게 고민하는 그런 복잡한 심경의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였는지, 처음에는 ‘딱 1년만!’이라고 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났다. 물론 쉽지 않았다. 3년을 한주도 빠지지 않고 원고를 쓴다는 것, 더구나 구약성경의 1/3이 되는 방대한 분량을, 마치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로 바위를 쪼개듯이, 조금씩, 꾸준히, 한결같이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 마지막 원고를 쓰는 것은 더욱 쉽지 않았는데, 우선 구약성경의 성문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를 짚어보기로 하자.
하느님의 질서로 삶을 이해하기
원고에 유독 슬픈 감정을 언급한 적이 좀 잦았던 것 같다. 여간해서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수녀원에 들어오자마자 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터이지만, 원고에 진심을 담자니 솔직한 감정을 숨기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확한 내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분노였던 것 같다. 사는 것에 대해,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해, 이 사회에 대해, 화가 많이 나있었지만 그것을 분노 자체로, 다듬지 않은 울분 그대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감정을 전이시켰던 모양이다.
분노를 슬픔으로…도대체 나는 무엇에 그토록 화가 나 있었던 것일까….
언젠가 말했듯이 인간은 누구도 같은 마음일 수 없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하고, 나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여야 하며,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너를 축복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다름 속에서, 비교의 덫은 불가피하게 생겨나고, 승자가 될 수없는 약자들은 분노를 슬픔이라는 감정으로 교묘히 바꾸어 품게 된다. 그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인간 삶의 근본적인 딜레마에 본질적 해법을 제시한다. 성경에 의하면 세상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주인이신 하느님의 질서에 맞추어 돌아간다. 결국 우리가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마찰과 두려움은 세상을 하느님의 질서에 맞추지 못하고 나의 시선에 맞추기 때문에 생겨난다.
내 질서가 우주의 잣대가 되다보면, 내가 왜 너보다 키가 작은지, 내가 왜 너보다 머리가 나쁘고 가난한지, 왜 내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났는지를 설명할 길이 없어지고, 애당초부터 내가 동의한 선택이 아니었으니, 세상은 못마땅하고 억울한 곳이 되고 말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번번이 빠지고 말았던 슬픔의 원인도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하느님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위주로만 세상을 본 어리석음이 언제나 문제였던 것이다.
범죄보다 더 나쁜 것
이러한 맥락에서 성문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전체를 보고, 그 질서 안에 배당된 나의 위치와 삶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만이 지혜와 구원의 조건이라고 단언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느님의 질서를 무시하고, 하느님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는 태도야말로 가장 큰 악이라는 것이고, 그 때문에 성경은 ‘하느님 없이 사는 어리석음을 가장 큰 죄’로 규정한다.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고 타인의 능력에 갈채를 보내면서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어 묵묵히 걷는 삶, 충분히 의미 있고 멋지다. 그런 사람을 하느님도 사랑하시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사람이 된다. 이러한 삶의 메커니즘이야말로 성문서가 제시하는 진정한 삶의 지혜라고 하겠다.
감사합니다
지난 3년간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지면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늘 다짐했지만, 글쎄요, 저 자신의 이야기만을 한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섭니다.
저는 가톨릭신문의 이 지면을 통해 매우 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지난 3년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아보지 못했던 사랑과 관심을 한꺼번에 받은 기분이고, 그 덕에 전혀 지루하지 않게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죄송한 것은 많은 분들의 편지와 전화를 받고서도 단 한명에게도 답을 드리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공평하게 무심했던 것이니 나만 외면당했나라는 생각은 안하셨으면 합니다. 지면은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친구 같아 편안했지만, 그 지면을 읽으시는 분의 생각과 말씀은 조금은 낯선 것이어서 선뜻 답을 드리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고, 빠지지 않고 기도 중에 기억했으니 용서해주셨으면 합니다.
형편없는 글이었지만, 그 안에 혹시라도 여러분께 전달된 하느님의 모습이 있었다면, 그 뒷자락만이라도 보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만남이었습니다.
부디 2006년에는 모든 분들의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시는 지혜와 은총 함께 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하느님의 기쁜소식 때문에 절로 퍼지는 여러분의 잔잔한 미소, 제가 기대해도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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