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 어둠 밝힌 25년 ‘빛 지기’
8년전 폭발사고로 몸 불편해도
배를 인도하는 마음만은 ‘풍성’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창세 1, 3)
▨ 환희의 신비
오후 5시20분. 화려한 물비늘을 길게 드리운 것도 잠시, 태양은 수평선 너머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대침묵(大沈默). 바다도, 새도, 바위도, 사람도…. 세상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바다는 어둠을 받아들였다. 이내 바다와 육지의 구분이 없어졌다.
그 사이로 한줄기 빛이 생겨났다. 여수지방해양수산청 백야도 항로표지 관리소 등대(이하 백야도 등대)가 일을 시작한 것. 높이 14m, 덩치가 22만 칸델라(candela, 광도 단위로 CD라고 표기한다)를 뿜어낸다. 촛불 22만개를 켜 놓은 밝기. 1928년 최초 점등한 77살 할아버지 등대지만 아직도 20초에 한번 발하는 빛은 바다 위를 40km나 달린다.
그 큰 빛 아래에 ‘빛 지기’ 정병만(요한.53)씨가 서 있다. 얼굴이 환하고 밝았다. 편견일까. 외로워야 할 등대지기의 얼굴에 외로움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등대지기를 노래한 많은 시(詩)들이 ‘등대지기는 외롭다’고 했다. 그런데 정반대 대답이 나온다.
“등대지기가 시를 썼다면 아마 등대지기는 외롭지 않다고 했을 겁니다.
등대지기가 아닌 사람들이 등대지기를 두고 외롭다고 하지요. 우리는 그렇게 감상적이지 않습니다. 외롭다는 것은 게으르다는 것입니다. 외로울 틈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이 얼마나 소중한데 외롭다는 타령을 합니까. 전 매일 등대를 밝히고, 일을 하며 기쁨을 느낍니다. 등대는 외로울지 모르지만 전 아닙니다.”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했다. 또 책 읽고, 조용히 묵상할 때가 가장 마음이 편하고 기쁘다고 했다.
빛을 받은 바다가 기뻐했다. 조금 전만해도 바다는 어둠에 갇혀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바다가 빛을 받고는 넘실거리고 있다.
“초등학생 때 선생님께서 장래희망을 물었을 때, 선장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등대지기가 됐으니, 소망을 이룬 셈입니다. 선장이나 등대지기나 모두 배를 인도하는 점에서 같은 일 아닙니까.” 정씨가 환하게 웃었다.
▨ 고통의 신비
밤이 점점 깊어졌다. 세상에는 등대의 빛과 등대 바로 뒤편에 위치한 사무실의 전등만 있었다. 정씨는 사무실에서 새벽까지 등대와 함께 바다를 바라본다. 찬 바람이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이럴 땐 옛날 이야기가 딱이다 싶어 살아온 이야기를 물었다.
“옛날에는 고생이 심했지요. 지금이야 장비가 좋아져서…”
하루 24시간 등대와 함께 살며, 바닷길을 밝혀온지 25년. 28살 청년이 그 사이 정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과거에는 직접 산에서 나무를 해와 난방을 해야 했어요. 식수도 부족해 일일이 물을 길어다 써야하는 형편이었지요. 전화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서, 말 그대로 사람 구경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자연히 인근 마을 사람들과는 형제처럼 지내게 됐다. “텔레비전이 귀하던 70년대에도 등대에는 텔레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나무와 먹을 것, 식수 등을 가져와 함께 등대에서 텔레비전을 보기도 했습니다.”
편안하던 정씨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고통스런 과거가 있다고 했다. “1998년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무인 등대 수리를 위해 배를 타고 출장을 갔을 때였다. 기계라면 못 고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손재주를 인정받던 정씨는 대부분 등대 수리를 혼자서 도맡아 하곤 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등대를 수리하는’ 평범한 날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사고를 당했다. 수리를 하던 중 무인 등대가 폭발한 것. 정씨는 바로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절망스런 말을 들어야 했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했다. 살아나더라도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씨는 삶의 끈을 놓지 않았다. 7차례에 걸친 대수술이 이어졌다. 아내는 10개월 넘게 남편의 대소변을 받아냈다. 엉덩이와 허벅지 등 피부가 있는 곳이라면 모두 떼어내 사고로 잃은 피부에 이식했다. 정성이 하늘에 닿았을까. 정씨는 2년여 만에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 있었다.
“사고 당시 없어진 발뒤꿈치 때문에 지금은 평지만 간신히 걸어다닐 수 있습니다. 등산은 물론 작은 오르막이나 내리막길도 힘듭니다. 여러 차례 피부이식 수술을 받아서 온 몸에 흉터가 심합니다. 대중 목욕탕에 갈 생각은 이제 접어야지요.”
현재 여수지방 해양청은 백야도 등대에 대한 자동화 설비 공사를 통해 오는 2007년 무인화 시킨다는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보수 공사를 통해 등탑을 20m 더 높인다는 소문도 들린다. “이 등대도 오래됐지요…” 정씨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영광의 신비
기적적으로 소생한 정씨는 가장 먼저 예비신자로 등록, 교리를 받았다.
“가톨릭 신앙을 갖는 것을 자꾸 늦추다가는 세례를 받지도 못하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세례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함께 백야도 등대에서 생활했던 안영일(요셉.광주대교구 안호석 신부 부친)씨의 모범을 보고 일찌감치 결심한 일이었다. 하지만 교리를 받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24시간 등대에서 생활하는 특성상 성당에 나가는 것 조차 힘들었다.
“내가 성당에 나가면 그 시간에는 대신 동료들이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세례를 더 이상 늦출 순 없었습니다.” 결국 2000년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아내는 글라리스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났다.
“만약 고통이 없었다면, 이처럼 세례를 받고 다시 태어나는 영광도 없었겠지요.”
정씨는 세례 이후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또 하느님께서 자신을 그동안 끊임없이 기다려 주셨다는 체험도 했다.
하지만 말이 신자지 성사생활은 거의 하지 못한다. 등대에서 생활하다 보니 주일을 거르는 것이 일상사다. 가까운 거리에 공소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워낙 벽지여서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주님께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성당에 나가 찾아 뵙지 못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묵주기도나 묵상기도로 대신할 수 밖에 없지요.”
두 딸이 어느 덧 시집갈 나이다. 대학을 졸업했고, 이제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도 다닌다. 정씨 부부에게 해외여행 시켜 주겠다고 할 정도로 마음도 컸다.
이제는 모든 것이 편안해 졌다. 세상 일에 대한 걱정도 없고 욕심도 없다.
“남들은 박봉이라지만 월급은 제가 받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등대가 내 평생을 이끌어 주었으니까, 이렇게 살 수 있도록 해준 등대에게 감사해야 지요.”
정씨가 등대를 노래한 시를 떠올렸다. “밤이 되면 당신은 나를 지켜 주는 등대입니다/ 당신은 하루도 쉬지 않고 나를 기다립니다”(남낙현 시 ‘등대지기 사랑’ 중)
▨ 빛의 신비
오전 7시30분. 어둠이 물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세상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바다에는 또다시 긴 물비늘이 드리워졌다. 혼자서 바다를 지켰던 등대가 마치 빛을 영접이라도 하는 듯 스스로의 빛을 거둬들였다.
“신년소망이요? 특별한 것 없습니다. 그저 가족 모두 건강한 것, 그게 다지요.”
아침이 밝았다고 해서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3시간 간격으로 기상 관측을 해야 하고, 정기적으로 해수 온도를 측정해 관련 기관에 통보해 주어야 한다. 해운조합 등 관련 정보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정씨가 등대 위로 올랐다. 그리고 한참 동안 바다를 내려다 봤다. 그리고 다시 내려와 잔디밭으로 향했다. 그리곤 말없이 잔디를 손질했다. 생명들을 돌보는 정씨의 손 위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창세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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