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치워야 하는데 힘쓸 사람은 없고…”
봉사단·사제·주민 모두 힘 합쳐
눈치우고 비닐하우스 철거 도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100평 남짓한 비닐하우스 한 동이 완전히 무너진 모습을 보며 누군가 한숨을 내쉰다. 어떤 일부터 해야 할 지 막막하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이 비닐하우스를 에워싸듯 쌓여 있어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힘들다. 새벽 잠을 설친 탓에 몸도 피곤하고 듣던 것보다 심한 피해현장을 보니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그대로 서 있을 수만도 없는 일.
“자자, 어서 비닐하우스 철근부터 치워봅시다. 자매님들은 삽으로 눈을 좀 치워주세요.”
누군가 작업을 재촉한다. 장갑을 고쳐 끼고 하우스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일행들. 1m 남짓 쌓인 눈을 헤치고 철근을 뽑는 사람들의 입에서 어느 새 “영차 영차” 소리가 들려온다. 철근을 잘라내는 톱질 소리도 처음보다 경쾌하다. 산더미처럼 쌓인 눈을 퍼내는 일이 쉽지 않은 듯 허리를 펴는 일이 잦았던 자매들도 이제는 제법 능숙한 솜씨로 삽질에 나선다.
지난 해 12월 30일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 감곡면.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카리타스봉사단(단장 정점길)의 폭설피해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날 새벽 서울을 떠나 세 시간 반 만에 이곳에 도착한 봉사단원들은 폭설로 비닐하우스 두 동이 완파되는 피해를 입은 조남용(베드로.69.전주교구 신태인본당)씨의 비닐하우스 철거 작업에 투입됐다. 신태인본당 주임 김봉술 신부와 전주교구 노동·농촌사목 전담 박동진 신부도 봉사단의 활동에 동참했다. 하루 안에 할 수 있을까 걱정됐던 일이었지만 봉사단원과 마을 주민, 그리고 신부들까지 손발 시린 것을 마다 않고 힘을 보태니 진척이 빠르다.
“10분간 휴식합시다. 먼 길 오신 것도 피곤한데 너무 무리하시면 몸살 납니다.”
따끈한 우거지 국물과 김밥이 차려진 새참시간. 국물 한 사발로 몸을 녹이며 한 자리에 모인 단원들과 마을주민들.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번 폭설 이야기로 모아졌다.
“눈을 치워야 하는데 힘 쓸 사람이 없어요. 젊은 사람들은 못살겠다며 도시로 다 나가고 나 같은 노인네들만 있으니 속수무책입니다.”
조남용씨처럼 폭설피해를 입은 주민 대부분은 노인들. 하우스가 무너져도 눈 치울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전.의경과 군인들이 나서 복구를 돕고 있지만 워낙 피해지역이 넓은 탓에 아직 도움을 받지 못한 농가가 더 많다.
이곳은 지난 해 여름에도 수해를 입었던 지역이어서 폭설은 지역 농가에 더 큰 타격이다. 여름 수해로 평소 농작물 수확량의 20%도 채 건지지 못한 농민들은 폭설피해로 겨울 하우스 농사마저 접어야 했다. 게다가 내년 농사는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한 형편이다.
“비에다가 이제는 눈까지…정말 하늘이 원망스럽죠.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살아야죠. 바쁜 연말에 시간을 내서 도움을 주시는 여러분들이 있어서 그나마 힘이 납니다.”
하우스를 철거하는 단원들의 몸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폭설피해를 입고도 손도 한 번 못쓰고 하늘만 쳐다봐야 했던 농민들의 아픔이 조씨의 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당초 계획했던 하우스 두 동의 철거가 생각보다 빨리 끝나자 미뤄 두었던 나머지 한 동의 철거에 나섰다. 재활용이 가능한 철근을 모아 무너진 비닐하우스 자리에 한 동의 골조를 피해입기 전처럼 복구해 놓는 작업도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마칠 수 있었다.
12월 28일 선발대로 파견돼 현장조사를 하고 이날 다시 봉사에 참여한 조창규(이레네오)씨는 “급히 봉사단을 꾸린데다 연말인 탓에 많은 인원이 참가하지 못해 아쉽다”면서 “카리타스 봉사단은 앞으로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힘을 보탤 것”이라고 말했다.
규모가 큰 연동 비닐하우스의 경우 중장비가 들어가지 못하는데다가 눈이 얼어 있어 본격적인 복구 작업은 올 3월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봉사단은 3월 중에도 구호인력이 필요한 곳을 찾아 봉사할 계획이다.
하루 동안의 짧지만 굵었던 봉사활동을 마무리 짓는 시간. 한 자리에 모인 단원들에게 김봉술 신부가 감사인사를 전했다. “성탄을 전후해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던 하느님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마음을 나누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이곳에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 주셨습니다.”
단원 한명 한명과 악수를 나누며 감사 인사를 전하던 비닐하우스 주인 조남용씨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일흔이 다 된 조씨가 일행 앞에서 눈물을 보이자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정말 뭐부터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제게 이렇게 힘을 주시니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 지…여러분들의 관심과 노력을 가슴에 새기고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김제평야의 모습이 마치 솜이불을 덮어 놓은 듯하다. 저 눈이 모두 녹을 때까지 농민들의 이마에 새겨진 주름과 가슴에 맺힌 시름은 계속 깊어갈 것이다.
■‘사랑을 더해요, 희망을 나눠요’
“얼어버린 마음, 함께 녹여야”
“올 여름에는 비가 그렇게 무서웠는데 이제는 제발 비가 왔으면 좋겠어요”
폭설로 큰 피해를 입은 호남지역 주민들이 기다리는 것은 비다. 비가 내려 눈이 녹는다면 무너진 지붕과 축사, 비닐하우스 복구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2월 한 달 간 눈이 폭탄처럼 퍼부은 후 강추위가 닥쳤다. 쌓인 눈이 모두 얼어붙어 복구는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다.
일손도 부족하고 장비도 변변치 않다.
전주교구 신태인본당 동막공소. 공소신자 김용(베드로)씨는 이번 폭설로 1000평 규모의 연동 비닐하우스가 무너지는 피해를 입었다. 연동 비닐하우스는 철근도 일반 하우스보다 굵은 것을 쓰는 데다 규모가 워낙 커 인력으로는 복구가 힘들다. 중장비가 있어야 하지만 마을 진입로가 빙판이어서 승합차도 들어오기 어렵다.
할 수 없이 김씨는 비닐하우스 철거를 올 3월로 미뤘다. 정부 보조를 받아 키우던 농작물이 다 죽어버린 것도 큰 손해지만 당장 내년 봄 농사는 어떻게 준비할 지 걱정이다.
공소회장 현금용(가스발)씨도 비닐하우스에서 키우던 복분자를 이번 폭설로 눈에 묻었다. 지난 해 3월부터 키워 올 초 수확을 앞두고 있던 터라 안타까움이 더욱 크다.
이번 폭설로 큰 피해를 입은 호남지역 농민 대부분도 현씨나 김씨 사정과 다를 바 없다.
전주교구 집계(12월 30일 현재)에 따르면 9개 본당 40여 세대 신자가 15억3800만원의 피해를 입었다. 특히 내년 농사에 영향을 주는 축사와 창고건물, 비닐하우스 피해가 커 피해 규모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욱 큰 형편이다. 광주대교구(12월 30일 현재)도 25개 본당 150여 세대 신자가 피해를 입었다.
한편 총 1억2천만원의 긴급구호금을 광주대교구와 전주·제주교구에 전달하고 카리타스 봉사단을 한 차례 파견한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는 ‘폭설피해지역 사랑을 더해요, 희망을 나눠요’ 제목의 폭설피해지역 주민 돕기 캠페인을 전개한다. 또 전국 각 교구도 2차 헌금을 실시해 폭설지역 피해 교구 돕기에 본격적으로 나설 예정이다.
이제 이들의 꽁꽁 얼어버린 마음을 따뜻한 나눔 열로 녹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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