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선물
사제품을 받고 첫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생활할 때 일입니다. 성탄절을 분주하게 지내고난 어느 겨울 날, 월요일 새벽미사를 드리려고 천근만근한 몸을 겨우 일으키는데 내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직도 미사를 시작하려면 30분이나 남았는데 꼭두새벽에 방문을 두드리는 손님이 짜증났지만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곳에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분이 서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주위를 두리번거리시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 내셔서 제 손에 꼭 쥐어 주시며 “아무한테도 주지 마시고 신부님이 꼭 잡수셔야 돼요.”하시고는 서둘러 성당으로 발길을 향하셨습니다. 뜻밖의 선물을 받아든 나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내 손에 쥐어주신 선물을 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신문지로 겹겹이 쌓여 아직도 온기가 느껴지는 쌍화탕 한 병과 초코파이 두 개였습니다. 추운 겨울 새벽 쌍화탕이 식을까봐 품속에 쌍화탕 병을 안고 눈길을 오셨을 할머니의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그날 미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와 초코파이와 쌍화탕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하며 할머니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사랑을 먹고 마시는 듯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선물을 받는 기쁨은 크지만 주는 기쁨도 큰 것입니다. 선물에는 받는 사람을 향한 마음이 담겨져 있으며 선물은 주고받는 사람의 관계를 드러내주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소중한 사람일수록 선물에 담은 마음이 정성스럽고 극진합니다. 아름다운 선물은 값비싼 물건이나 화려한 포장이 아니라 선물 안에 담긴 정성과 사랑입니다. 작은 것이지만 사랑을 담고 있는 선물은 그 선물을 주는 사람에게나 받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감동을 주고 기쁨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귀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우리에게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선물입니다. 가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시는 표징입니다. 그 선물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그 선물을 받고 기뻐합니다. 이방인이었던 동방 박사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선물을 알아보고 그 선물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하느님의 선물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의 선물을 거부하고 그 선물을 내동댕이치고 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마저도 흔적 없이 해치우고자 하는 헤로데의 모습은 다른 생명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이루어 내고자하는 ‘죽음의 문화’ 속에 드리워진 그림자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서슴치 않는 세상이 만들어낸 죽음의 문화는 하느님의 선물을 거부하고 내 팽개쳐 버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보여 줍니다. 헤로데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그 선물이 얼마나 위대한 선물인지를 모른 채 술렁댑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참된 가치 앞에서 술렁거리며 당황하게 마련입니다.
주님 공현 축일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선물을 세상에 여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선물 안에 담긴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은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다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에페 3, 6)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선물은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 안에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가족들 안에, 함께 사는 이웃들 안에,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안에 계십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의 인도를 따라 예수님을 만났듯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내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내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내 용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하느님의 선물에로 인도하는 표징입니다. 비록 시간을 내야하고, 희생과 인내를 필요로 하고, 기다리고 함께해주는 일이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내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을 멈추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예물로 봉헌합니다. 금과 같이 고귀하고 변치 않는 신념, 유향처럼 피어오르는 거룩한 삶,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진리를 증언하는 진실한 사랑을 하느님의 선물에 대한 예물로 봉헌함으로써 그분의 축복을 온 세상에 전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김영수 신부 (전주 용머리본당 주임. www.yongme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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