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 향한 비움의 정신 세계신학 창조적으로 수용
최근에 ‘두물머리의 영혼, 정약용’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두물머리 정신’이라는 비전을 소개한 바 있다(성모기사 348호, 40∼44쪽).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세상의 모든 문화와 종교 전통을 만나서 자기의 존재 이유를 실현해 가는 정도(正道)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 신학과 한국신학을 소통시킬 대원리로서 ‘두물머리 정신’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강은 남한강과 북한강, 두 큰 물줄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물이 머리를 맞대고 만나는 자리, 그곳이 경기도 양평에 있는 양수리(兩水里), 우리말로 ‘두물머리’이다. 그러니까 ‘두물머리’는 북과 남에서 내려온 물들이 한데 얼려 부등켜안고 인사를 나누는 합류 지점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한강 물줄기를 본격적으로 개시시키는 한강의 머리가 되는 곳이다.
역사가 증거하는 것처럼, 모든 문화의 합류를 성사시킬 조건은 한 가지이다. 두 물보다 낮을 것. 합류를 낳는다는 것은 합류하는 두 물의 바닥이 되어 준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듯이, 두 문화의 합류를 성사시킨다는 것은 두 문화의 위가 아니라 밑이 되어 준다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은 바다라고 노래한 시인이 있다. 그런데 바다가 하느님을 닮은 것은 푸르고 넓고 깊고 커서가 아니다. 세상의 낮은 자리, 바닥이어서야말로 바다는 하느님을 닮았다. 댐은 높이 솟아 물을 고이게 하나, 바다는 자기를 낮추어 세상 온물을 품어 안는다. 강원도 태백산과 금강산 높은 데서 샘솟은 물들이 강줄기를 이루어 바다를 그리며 꿋꿋이 지켜가는 저 바닥을 향한 자기 비움. 이 낮아지기야말로 두물머리를 끼고 있는 양근 지대, 한국 천주교의 태동 지역을 아름답게 한다. 그리고 바로 바닥을 향한, 바다를 향한 저 자기 비움의 정신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세계 가톨릭 신학을 창조적으로 수용하여 민중을 품어갈 정도이다.
실로, 북에서 발원한 것이든 남에서 샘솟은 것이든, 물은 아래로 흐르는 법이다. 물에게는 언제나 자기가 존재하는 그 자리가 가장 낮은 곳이다.
낮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움직여 간다. 낮은 데를 거부하고 위로 오르려 할 때, 그때 물은 자기의 명을 다하고 만다. 아래로 흐르는 것, 그것만이 바다에 이르는 길이다. 그것만이 생명의 바다에 이르는 길이고, 그것만이 지구를 품어안는 길이다.
사제와 종신 서약 수도자들은 자기 몸을 바닥에 내어맡긴 채 하느님의 품에 얼굴을 묻은 존재들이다. 그렇듯이 저 바닥을 향하여 자기를 낮추는 것만이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을 섬기는 유일의 길이다. 그것만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시어 이 세계와 만민과 연대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저 케노시스(kenosis, 卑虛)를 닮는 길이다.
과거 아시아 교회에 그토록 커다란 상처를 남긴 제사 문제의 핵심도 사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시아를 만난 서구 가톨릭 교회가 유럽의 정신에 갇힌 채 아시아의 ‘효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해하지 못한 데서 그치지 않고 유럽을 떠나 아시아 지역에 와서도 유럽 교회 지도자들은 끝내 아시아의 문화와 관습과 영성을 위에서 누르면서 제사를 우상숭배로 단죄하고 마는 비극을 유발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앙은 이땅의 신앙 선조들의 영과 실천을 통하여 조선의 학문과 영성 전통과 합류하여 조선 민중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품게 하는 원천이 되어 왔다. 한강의 두 물줄기가 500여 킬로미터를 굽이쳐 흐르며 한반도 민중의 육과 영을 길러 왔던 것처럼.
실로, 바닥이 된다는 것은 어머니처럼 돌보는 이가 된다는 것을 가장 위대하게, 가장 아름답게 설명한다. 어머니로서 바닥되기, 바로 여기에 우리 교회의 미래가 있다. 오직 이를 통해서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낮추셨듯이, 우리 교회가 이 민족에게 영의 밑자리가 되고, 정의의 바닥 자리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우리 교회가 체화할 한강의 ‘두물머리 정신’이라고 일컫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이땅의 가난한 이들과 고통당하는 이들, 이땅의 신음하는 산하를 돌보고, 지역 사회와 민족의 동반자로 거듭날 바른 길이라 믿는다.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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