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아’로 왕을 일으켜 세우다
환희의 눈물 흐르게 하는 대작
오페라와 관현악 작품도 많아
1742년 어느날 런던, 영국왕 조지 2세는 공연 도중 가슴으로 벅차오르는 감격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중 제2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속죄를 노래하는 많은 합창곡들 중 ‘알렐루야’가 울려퍼지는 순간이었다.
종교적 영감을 바탕으로 힘차고 장엄한 합창곡이 펼쳐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선 왕. 이후 수없이 되풀이되는 이 감격적인 연주의 순간에 청중들은 모두 기립하는 것이 연주회의 전통이 되었다.
바흐의 ‘마태오 수난곡’이 청중의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오열을 불러온다면 헨델의 ‘메시아’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견줄 만큼 웅장한 스케일과 구도, 곡 하나 하나마다 환희의 눈물이 양볼을 적시게 하는 벅찬 감격의 곡이다.
오늘날에도 헨델의 ‘메시아’는 종교적 감흥을 일으키는 연주회의 단골 레퍼토리이다. 메시아가 대중 앞에서 처음 연주된 것은 1742년 4월 13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피셤블가 대음악회장에서이다.
더블린 초연 당시, 엄청나게 쇄도하는 청중들 탓에 부인들은 후프(스커트를 펑퍼짐하게 벌어지게 하는 버팀살)를 착용하지 말고, 신사들은 칼을 차지 말도록 광고를 해야 할 정도였다. 공연이 끝난 뒤 ‘더블린 저널’ 4월 17일자에는 “경탄하는 청중이 홀을 가득 메웠고, 그들이 이 작품에서 받은 최고의 환희는 필설로 다 묘사할 수 없다”는 평이 실렸다. 그리고 그날의 감동은 지금까지 수백년 동안 재현돼 왔다.
헨델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더할 나위 없이 의미 깊은 것이었다. 그것이 고전음악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도 특별하지만, 헨델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 곡은 좌절과 절망으로 혹독한 위기에 처해 있던 자신의 인생을 다시금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기회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풍의 오페라에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음악 양식을 갈구하던 영국의 청중들과 비평가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 당하고, 이전까지 온 영국에 위대한 음악가로 이름을 떨치던 헨델은 음악회마다 실패를 거듭하던 때였다.
고육지책으로 영어 대사를 사용한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그가 누리던 영예와 명성을 되찾아주지는 못했고, 거듭된 실패로 인해 그는 경제적, 정신적 고통으로 갖가지 병을 얻어 쓰러졌다.
그러던 중 거동이 부자유스러울 정도로 육체적으로도 고통을 겪던 그는 더블린의 한 자선음악 단체로부터 의뢰를 받아 ‘메시아’의 작곡에 착수한다. 항상 자선 활동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자선사업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사재를 털던 그였기에 이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엄청난 대작의 작곡은 1741년 8월 22일에 시작됐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은 불과 24일이 지난 뒤였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이 엄청난 작품이 완성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지만 이는 오히려 헨델이 얼마나 벅찬 영감 속에 이 작업에 열중했었던가를 미뤄 짐작케 한다. 헨델은 24일 동안 거의 침식조차 잊은 채 열에 들뜬 사람처럼 이 곡을 작곡했다.
바로크 시대 대표
메시아로 대표되는 헨델은 바흐와 함께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각각 음악의 아버지, 어머니로 불린다. 1685년 독일의 작센 지방 할레에서 태어난 헨델은 외과의사였던 아버지와 깊은 신앙심을 간직하고 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할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기간 중에도 음악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다가 1703년 함부르크로 가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 발표한 ‘알미라’는 큰 성공을 거뒀다.
1706년에는 이탈리아 메디치가의 초청으로 피렌체로 갔고, 이탈리아에서 약 3년간 체류하면서 여러 도시를 방문하며 왕성한 음악 활동을 했다.
1710년에 다시 독일로 돌아온 헨델은 하노버 궁정의 음악감독이 됐으나 곧 휴가차 영국을 방문했고 다시 독일로 왔다가 재차 영국으로 건너간 그는 1726년 아예 영국으로 귀화해 시민권을 얻었으며, 1759년 4월 14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영국에 머물렀다.
‘메시아’의 대성공으로 오라토리오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헨델이 명성을 얻은 것은 오페라에서였다. 40여편 이상의 오페라들은 당대 최고의 작품들로 인정받았고, 1720년대 중반에 작곡한 ‘줄리어스 시저’, ‘로델린다’, ‘타메를라노’ 등은 걸작으로 꼽힌다.
오페라가 실패하자 시작한 오라토리오는 공연을 위한 제작비가 적게 들고 합창이 강조되기 때문에 가수의 캐스팅 등에 어려움이 적어 매우 경제적인 음악활동이었다. 그의 오라토리오는 영웅적인 인물 묘사나 역사적 사실을 다룬 것들이 많았는데, ‘헤라클레스’, ‘삼손’, ‘솔로몬’ 등이 대표적이다.
헨델은 또 성악음악 만큼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기악음악에 있어서도 자주 연주되는 곡들을 작곡했다. ‘왕궁의 불꽃놀이’나 ‘6개의 합주협주곡’ 등은 대표적인 관현악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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