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 서다’의 의미
우리는 기억한다. 예수께서 피땀을 흘리셨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올리브산에서 기도하시며 아버지께 청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예수께서도 처참하게 수난을 당하시고 무덤에 묻히는 일을 꺼리셨다.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처럼.
그런데 그분은 곧바로 기도하셨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 42)
이 순명이 그분이 시체가 되게 하고, 무덤에 묻히시게 하였다. 하지만 그런 분이셨기에 그분은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루카 24, 26) 하고.
이 스승의 길을 따라 걸었던 제자 가운데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이들이 있었다. 한 수도자가 말하였다. “저는 제 앞에 있는 일을 보고 있는데 그 일을 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답하였다. 그대가 “무덤에 누워 있는 시체들처럼 되지 않으면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네.”(A. 그륀저, 김부자역, 사막을 통한 생명의 길, 28)
실로 하느님의 일은 머리로 생각하고 지성으로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온 마음과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 마음과 영과 몸으로 자기를 내어드릴 때, 그분이 알아서 쓰실 것이다. 마치 북이 자기를 비우고 기다렸다가 두드리는 채에 온몸을 내맡길 때에 비로소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는 것처럼.(K. Coyle 수녀의 “북” 묵상)
비움의 영 없이는 어느 북도 맞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맞지 않으면 어떤 북도 소리가 나게 할 수 없다.
보라, 십자가에 달려서 하느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전해지게 하신 분을. 맞았을 때, 그때, 가슴 저리도록 아프게 메시지가 발생했다. ‘내가 너희를 다시 일으켜 세우니 이제 함께 하느님의 축복을 노래하며 춤추라’ 하시며 하느님의 생명 나라로 부르시는 초대가.
여기서 마음과 몸이 함께 하느님의 생명의 다스림에 응답하는 차원이 드러난다. 우리는 이 점을 ‘이해’를 뜻하는 영어(under-standing)에서 역동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해는 단지 지성의 차원에서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과 발이 움직이는 차원을 포괄한다. 실로 understanding은 밑(under)에 서는 것(standing)을 뜻한다.
자기가 이해한 그것의 아래에 서서, 이해한 것을 따라 사는 것을. 이런 의미에서 이해는 머리로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하는 것이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아래, 곧 뒤에 설 줄 모르면, 이해한 것이 아니다. 주님을 이해했다면서 그분의 길을 가로막는다면, 그분에 대한 이해는 적어도 제한된 것이다. 예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앞으로 나서며 가로막았을 때, 그분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사탄아, 내 뒤에 서라” 하고.(마르 8, 33)
아래에 선다는 것은 주님이 주님이시게 하는 영으로 너를 너로 살게 하고, 주님께서 가시는 곳을 함께 동반하듯 네가 갈 곳으로 건너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님을 아는 세례자 요한이 그분의 길을 닦았듯이, 네가 갈 곳으로 가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이해(理解)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이해(理解)란 원래 결대로 가도록 풀어 주는 것을 뜻하니까.
이런 맥락에서 땅의 존재가 새롭게 다가온다. 얼마나 잘 이해하면, 밟히고 밟히고 또 밟혀도 묵묵히 우리가 건너게 하고 살게 하는가.
복되다, 땅의 저 아래에 있을(understanding) 능력을 가슴에 품는 이들은. 스승 예수께서 우리가 사는 땅으로 와서 텐트를 치시고는 이 땅의 영성, 땅의 언더스탠딩을 사셨기 때문이다.
돈을 심고 키우는 농부 말고, 하늘과 땅과 물과 바람과 풀과 대화할 소양을 갖춘 농부들이 하느님과 예수님과 친한 이유 또한 이들이 땅을 품고 살기 때문인데, 우리가 그분의 제자인 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것이다.
땅의 언더스탠딩. 밑에 서고 아래로 내려서는 것. 밟히는 것. 그래서 너를 건너게 하는 것. 하느님께로, 진리에로, 생명의 관계로.
이런 의미에서 “땅-심”-“민-심”-“천-심”에 귀기울여 응답하는 것.
이 천지인의 마음을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관계와 그리스도인의 신앙 실천 구조에 육화시키는 것이야말로 바른 토착화의 길이다. 우리 교회는 이 토착화의 여정에서 어디에 있는가, 지금?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